▲ 지난해 11월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부지에서 열린 한전 신사옥 착공식에 참석한 김중겸 사장(왼쪽). 그는 올해를 ‘흑자 전환 원년의 해’로 삼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연합뉴스 |
이 사안은 이미 한전 이사회에서 의결됐다. 이제 각 발전자회사의 주주총회에 안건으로 올려질 예정이다. 한전이 대부분 자회사 지분의 과반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이기에 주총에서 안건이 통과될 것은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한전은 배당금만으로 약 7500억 원을 챙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전의 이 같은 요구에 자회사 노동조합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19일 한전 자회사 노조는 공동으로 성명서를 내고 2011년도 순이익의 70%를 배당금으로 요구하는 것에 대해 “경영실적을 만회하기 위해 자회사들의 성장과 미래를 말살하려 한다”고 규탄했다. 또 “자회사들의 중장기 부실을 초래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한전과 자회사 관계뿐 아니라 국민경제에 크나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며 ‘총력투쟁’을 천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회사 노조가 주총을 가로막거나 주총에서 안건을 부결시킬 수 있는 힘은 없다. 박원식 한수원노조 대외협력국장은 “각 사별로 주총에서 대응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며 “궁극적으로는 정책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연맹 산하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회사의 적자를 이유로 자회사의 수익을 착복해간다면 노동권 말살은 피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즉 한전이 자회사 순이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면 해당 자회사 노동자들의 임금동결, 고용축소 등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전 측은 한전과 자회사 간 전력거래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이대로라면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해 한전은 3조 51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한전 관계자는 “생산원가에 적정 이윤을 얹어 자회사에 사오는 전력을 국민들에게 매입가의 90% 가격에 공급한다. 적자가 쌓이면 당연히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발생한다”면서 “고액 배당 요구를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최소화하는 방법 중 하나이자 자회사들과 고통을 분담하자는 차원으로 해석해달라”고 말했다.
자회사 노조와 에너지 관련 단체의 말을 빌리면 수년간 적자를 기록해오던 실적을 만회하기 위해 김중겸 사장이 무리하게 몰아붙이고 있다고 간추릴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김중겸 사장의 당면과제 중 하나가 한전의 흑자전환이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김중겸 사장이 불도저 정신이 내재돼 있는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라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요소”라고 관측했다.
한전과 김중겸 사장은 올해를 ‘흑자전환 원년의 해’로 삼고 있다. 수년간 한전을 짓눌러오던 ‘적자 지속’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다양한 방편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해외사업 확대다. 김 사장은 ‘현재 3%대인 한전의 해외사업 비중을 50%까지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해외사업 수익을 극대화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보전하고 국내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국내에서 전기요금을 인상한다든가 자회사 수익에 대해 고액 배당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흘러나온다. 당초 약속한 대로 해외사업에서 수익을 올려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없앰으로써 공기업으로서 국민경제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질책이다. 그러나 한전은 지난해 11월 17일 전기요금 10% 인상안을 이사회를 통해 기습 의결한 바 있다. 김쌍수 전 사장이 그토록 원했지만 관철시키지 못해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원인이 된 전기요금 인상을 김중겸 사장은 전광석화처럼 이뤄낸 것이다.
고작 3%의 해외사업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린다는 게 현실성 있는 목표인지도 의문이다. 비록 요르단에서 IPP(independent power plant·독립발전사업)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한전 관계자는 “아직 사장으로 취임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다”며 “기반을 다지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김중겸 사장은 한전 사장으로서 운이 따르기도 했다. 한전 사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9월 15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를 내정자 신분으로서 비켜갈 수 있었다. 또 정부가 강제로 에너지 사용 제한 조치를 내림에 따라 지난 겨울 막대한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었다. 자회사들에 고액 배당을 요구한 이번 사안도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일방적인 요구가 틀림없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송유나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정책연구실장은 “한전이 무리수를 두고 편법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력거래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며 “현재 전력거래제도에서는 발전 자회사들이 고수익을 누리고 한전이 최종 리스크를 떠안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송 실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공기업을 민영화·시장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력거래제도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송 실장 역시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책과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지, 노동환경에 직결돼 있는 노동자들은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한전이 자회사에 요구한 고액 배당은 실현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김중겸 사장이 국내 사업과 관련해 앞으로 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다. 한전 관계자는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지 앞으로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라며 여운을 남겼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