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본관 전경. | ||
이는 삼성그룹 문제가 정·재계의 현안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하지만 재계일각에선 삼성의 발표 직후 이런 멘트가 쏟아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삼성이 이번 발표를 앞두고 여권 등 여론주도층을 상대로 상당기간 공들여 사전 조율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은 통상적으로 현안이 생길 경우 해법 도출을 위해 사전에 관계당국이나 이해집단을 대상으로 여론을 떠보고 반응을 모니터링 한다. 이 과정 자체가 여론 마사지 기능을 하기도 한다. 주무부서는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의 대외협력단(대협단)이다. 최근 대협단 조직 체계에 변화가 있었다. 대협단 주니어팀을 구조본 직할로 끌어들인 것. 때문에 삼성의 현안 문제와 관련 삼성그룹 내부의 변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해 삼성그룹 최대의 현안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를 정점으로 한 후계 구도의 조기 가시화다. 이를 실행키 위한 컨트롤 타워는 구조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고, 여론 조성, 대정부 및 정치권 접촉 통로는 통칭 대협단으로 불리는 그룹 조직이다.
대협단은 구조본 기획팀장인 장충기 부사장, 최광일 상무가 실무를 맡아하며 구조본 직할의 소위 ‘주니어팀’이 있고, 각 계열사별 대협단 간사 및 단원들이 포진해 있다. 주니어팀은 최근에 구성된 조직인데, 예전 각 계열사 대협단 간사 경력이 있는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국회쪽 접촉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다.
대협단은 정계 재계 관계 언론 검찰 시민단체 등 기업 경영과 관련된 오피니언리더 그룹과 우호 협력 관계를 조성하고 기업 경영과 관련된 위해적인 요인을 사전에 발견, 이를 차단하는 활동을 한다.
삼성의 대협단은 2년여 전부터 차단의 원칙을 적용, 분야별로 방호벽을 쌓아 놓았다. 계열사별로 올라오는 정보 보고는 대협단의 데스킹 기능을 하는 임원 및 직원 외에는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가령 삼성생명의 대협단원이 삼성중공업 부문의 정보를 열람하지 못하는 식이다. 대협단원들이 외부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정보들이 불필요하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구조본 기획팀에는 대협단과는 별개로 이범희 전무를 정점으로 하는 정보조사팀이 있다. 정보조사 부문은 대협단처럼 광범위한 계열사 조직을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정보조사 업무만을 전문으로 하는 직할 주니어팀을 가지고 있다. 정보조사 직할 조직은 대협단 직할 주니어팀보다 더 오래되었다. 대협단과 정보조사 부문의 주니어팀들은 이번 구조본의 조직 개편에는 포함되지 않는 별도 조직이다.
대협단을 운영하는 장충기 부사장, 최광일 상무는 이학수 부회장의 사람으로 분류된다. 삼성의 후계 구도가 꼬이게 된 것은 삼성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한 그룹 계열사 순환 출자 및 이재용 상무의 삼성 에버랜드 대주주 지위 획득 과정 때문이다. 이 상무는 주식 전환 과정에서의 헐값 인수 때문에 경영권 획득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05년 1월 BW를 발행했던 삼성 에버랜드의 당시 경영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즉 경영권 후계 구도 문제 풀이를 잘못한 당사자들이 그룹의 핵심 조직이랄 수 있는 대협단 운영의 책임자로 있는 셈이다. 물론 삼성쪽에선 ‘물의를 빚어서 국민여러분께 죄송하다’고 말할뿐 여전히 ‘이 상무의 주식 취득과정에 불법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애초 구조본 기획팀과 별개로 출발한 대협단은 1993년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사업 진출 이후에도 해체하지 않고 유지됐다. 대협단은 2002년 대선 자금 수사를 경험하면서 과거에 축적했던 대부분의 문서들을 파기했고, 주요 인물 DB 정도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기업 대외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언론의 경우 가판 폐지, 광고 위력 약화, 접대비 한도 축소, 기자 집단의 의식 변화 등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성은 사회 환경 변화에 따른 대외 협력 업무를 위한 휴먼 네트워크 구축의 개념을 재설정했다. 타깃 오디언스(엘리트, 실무 그룹)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스킨십을 강화하고 및 접대 문화의 개선(가족들의 애경사 챙기기, 공연 등 문화 체험 공유 등)을 통해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협단을 중심으로 한 삼성의 로비 패턴은 많은 인력을 동원하되 생각만큼 많은 돈은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협단원들에게는 자신이 속한 계열사 법인카드가 지급되고 단원들은 이를 적극 활용한다. 명절 때는 백화점을 통한 선물 배달이나 상품권 등이 직접 전달되는데 수십만원 범위를 넘지 않는다. 이슬비에 옷이 젖는 대인 접촉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대협단의 주요 활동 중 하나가 삼성과 관련된 이슈에 대한 사회 여론 주도층 모니터링이다. 이슈 발생 이후 반나절 또는 하루만에 이루어져 신속성과 분석력이 놀랍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삼성의 니즈에 맞는 여론만을 수집, 보고하다 보니 ‘입맛 맞춤형’ 여론이 상부에 보고되는 예도 있다고 한다. 구조본 홍보팀은 홍보팀대로 각 매체의 사설 및 기사의 논조 등을 분석 보고한다.
▲ 올해 삼성그룹 대외협력단의 최대 현안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오른쪽)의 그룹 승계구도를 조기 가시화하는 일이다. 왼쪽은 지난 7일 대국민사과를 하는 이학수 부회장. | ||
예를 들어 지난 98년 삼성이 자동차 사업 지속을 위해 필수 조건이었던 부도난 ‘기아자동차’ 인수 과정에서 당시 실세 경제관료와 친분이 있던 인사가 기아차 입찰 심사위원장으로 내정되자 구조본의 대협단 책임자였던 Y씨(현 삼성 계열사 부사장)가 접촉했고, 이 과정에서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심사위원장으로 거론되던 K씨가 삼성측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Y씨는 2002년 이회창 캠프에 대선자금을 전달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는 등 한때 삼성그룹의 대표적인 대외협력통으로 알려졌었다.
대협 업무를 하는 고위직들과는 달리 대협단원들에 대한 처우는 화려하지만은 않다. 이들이 승진하는 것은, 계열사 단원 경험을 거쳐 구조본 기획팀 등에서 데스킹 기능을 하다 임원을 단 뒤 계열사로 내려가는 순환 방식인데, 대협단 전체에서 구조본의 몇 사람만이 빛을 본다. 특히 주니어팀에 한 번 소속되면 데스킹 부서로 가기 힘들다. 또한 계열사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오히려 진급 등에 불리할 때가 많다. 이러다보니 이들의 불만도 높아 고급 정보들을 외부에 흘리는 경우도 많다.
구조본에서 부장으로 있다 상무보를 달면 1년 만에 ‘보’를 떼는데 일단 계열사로 내려가면 3년은 걸린다. 각 계열사의 대협단원들은 특히 국회 회기 기간에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삼성 계열사의 차·부장급이면 자신이 속한 기업의 해당 여야 상임위원장 방은 수시로 드나든다. 심지어는 여야의 대표급 의원 방에도 자주 드나드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해당 의원의 보좌관들을 통해 소속 계열사 및 그룹과 관련된 질의 등을 미리 확인하고, 심지어는 질의 수위를 조절하는 ‘신공’도 보인다고 한다.
삼성에는 대협단 소속은 아니면서 사실상 그룹의 대협 업무를 수행하는 임원들이 있다. 이들은 그룹 조직인 ‘미래 전략위원회’를 거쳐 그룹 사회봉사단 총괄 업무를 맡고 있는 민경춘 전무와 사회협력위원회 업무를 하는 홍순직 부사장, 구조본 기획팀에서 정보조사 업무를 총괄했던 변종경 전략지원 그룹(홍보부문) 부사장이다. 이들은 공히 계열사인 SDI에 소속되어 대외적으로 이해진 사장을 정점으로 한 사회봉사 업무를 하면서도 개인적인 이력 때문에 그룹 현안이 발생하면 각계의 막강한 대외인맥을 가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 전무는 삼성그룹 대외협력 업무의 원조로 불린다. 앞서 언급한 Y부사장보다는 대협 업무에는 선임이었으나 중간에 계열사로 전보되면서 경력 관리 등에 불이익을 본 것으로 알려진다. 홍 부사장은 산업자원부 간부 출신으로 1995년 삼성경제연구소를 거쳐 SDI에 소속되어 있으나 그룹의 대외 업무에 많은 관여를 한다. 특히 경제부총리를 지낸 K씨 등 경제관료들과 친분이 돈독해 금융감독위에서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을 소환했을 때도 ‘많이 바빴던’ 것으로 알려진다. 변 부사장은 삼성의 정보조사 부문의 하드웨어격인 그룹 전산망 ‘싱글’의 개발 책임자였으며, 10여 년 이상 대외 정보조사 부문의 일을 해왔다.
최근에는 삼성의 이런 조직적인 ‘업무처리’를 보고 삼성의 대협단 조직을 벤치마킹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CJ그룹 회장실은 정보조사 업무 및 사회 공헌 업무를 하는 전략지원팀을 2004년 구성했다. 현재는 10여 명의 인력이 있다. 대협 업무는 사실상 그룹 홍보를 담당하는 (주)CJ 홍보실내 대협 파트에서 업무를 수행중이다.
현대차 그룹은 정세영 회장 시절부터 기획팀내에 정보팀을 운영했으나 정몽구 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개편되었고, 최근에는 경영전략실을 신설, 조사 및 대외협력 업무를 확대 추진하고 있다. 2세 승계문제와 노조와의 관계설정에 애를 먹는 현대차도 대외창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3년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직후 계열사의 한 임원은 “SK도 삼성과 같은 조직이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일사불란하게 가동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면서 탄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이 이 부분에서도 최강이란 얘기다.
삼성의 대외협력 조직은 예전만큼 그룹 차원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하기 보다는 핵심 업무는 소수 정예의 전문가 그룹이 수행하는 양태로 바뀌었다. 삼성은 이번 발표에서도 구조본 축소를 내걸었다. 그러나 긴급한 현안이 있을 때는 그룹의 전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학주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