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사회당 당원들이 한남동 이건희 회장 자택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6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귀국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귀국 직후 삼성은 8천억원 기부를 골자로 한 각종 사회복지 대책을 공표하며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 사카린 밀수사건 이후 고 이병철 회장이 상당량의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러나 삼성의 이번 조치만으로 ‘반 삼성’ 정서를 모두 잠재우기엔 부족해 보인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선 ‘그 정도로 되겠느냐’는 이야기마저 제기된다. 삼성에 대한 여론악화는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건에 대한 수사당국의 조사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개월간 장기외유를 하며 절치부심했을 법한 이 회장이 지금과 같은 반응을 예상치 못했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렇다 보니 이 회장과 삼성이 여론무마를 위해 추가로 내놓을 카드에 재계와 정치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우선 삼성이 풀어놓을 돈 보따리에 8천억원만이 들어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 귀국 다음날인 지난 7일 삼성은 이 회장 일가 사재 8천억원의 조건 없는 사회 기부 의사를 밝혔다. 지난 2002년 이 회장과 아들인 이재용 상무, 그리고 몇몇 계열사가 공동 출연해 설립한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기금 4천5백억원에 이 회장 일가가 추가로 3천5백억원을 더한다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적지 않은 액수임에도 기금 조성 내역에 대한 비판여론이 벌써부터 등장했다. 장학재단 기금의 경우 이미 200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번 삼성 사태에 대한 반성의 성격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4천5백억원 중 이 회장이 1천3백억원, 이재용 상무가 1천1백억원을 부담하고 나머지 2천1백억원을 계열사에서 책임진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총수일가가 져야 할 부담을 계열사에 넘겼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회장 일가가 추가로 조성할 3천5백억원은 계열사 지분 취득으로 발생한 이 상무의 추정 이득 약 8백억원과 이부진 이서현 자매의 5백억원, 그리고 고 이윤형씨의 유산을 포함해 이 회장 일가에서 2천2백억원을 기부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이 회장 자녀들의 추정이득은 시민단체가 주장해온 금액에 맞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연말 말 이윤형씨 사망 당시 그의 유산은 2천억원 상당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삼성측에서 이 돈을 상속받지 않고 사회사업에 투자할 것이란 관측이 대두된 바 있다. 앞서 거론된 장학재단 기금 4천5백억원과 이윤형씨 유산 2천억원을 합한 6천5백억원은 이미 삼성이 사회 기부를 약속했거나 검토중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삼성이 새로 출연한 금액은 1천5백억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마저 제기된다.
이 같은 비판론에 대해 다수 재계 인사들은 “삼성측이 이번에 풀 돈보따리 마지노선을 8천억원에 국한하지 않았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실제로 8천억원 환원 발표 이후 삼성은 곧바로 중소기업 지원방안 차원에서 1조2천억원+α 기금마련을 발표했다. 1조2천억원 기금은 이미 지난 연말에 삼성이 중소기업과의 상생차원에서 마련하겠다고 공언한 금액이다. 재계인사들은 삼성이 ‘+α’를 계속 붙이는 식으로 4월까지 돈보따리를 풀어놓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여기엔 곧 다가올 독일월드컵과 지방선거라는 변수가 깔려 있다. 현재 해외 전지훈련중인 월드컵 대표팀은 3월 초에 해산됐다가 5월 초에 다시 소집된다. 이 때가 되면 여론은 온통 월드컵 열기에 빠져들게 된다. 월드컵 기간과 맞물려 5월 말에 치러질 지방선거 역시 대선을 1년 반가량 남겨두고 치러지는 전국단위 선거란 점에서 최대 이슈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한 업계 인사는 “삼성이 4월까지 여러 방식을 통한 사회환원 작업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반 삼성’여론이 불거질 때마다 삼성이 ‘+α’식의 환원 계획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여론 무마 시도를 하는 한편 월드컵과 지방선거 특수가 ‘반 삼성’ 여론의 열기를 떨어뜨려 주기를 기대할 것”이라 전망했다. 4월쯤 되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도 일단락될 가능성이 높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돌아온 이 회장의 ‘칼집’ 안에 돈다발만 들어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성의 사회 환원 작업과 맞물려 예측가능한 부분이 바로 내부 핵심인력에 대한 인적쇄신이다. 현재까진 이학수 본부장을 비롯한 구조본 실세인사들에 대한 이 회장의 신임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 삼성측의 입장이다. 그러나 삼성의 지속적인 물량공세로도 반발여론이 무마되지 않을 경우엔 인적쇄신을 통한 위기돌파 수순 밟기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자동차 사업 실패와 외환위기 사태 이후 자동차 사업을 적극 추진했던 구조본 내 기획팀 인사들에 대한 퇴출을 단행했던 바 있다. 이후 구조본 내에선 이학수-김인주 라인을 중심으로 한 재무팀 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현재 삼성 사태에 대한 고위직 인사태풍 가능성은 일부 인사들이 지난 연말 사의표명을 했다는 소문과 맞물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해 삼성 구조본 대규모 인사소문이 재계 전반에 퍼지면서 구조본내 몇몇 팀 간의 알력설과 일부 팀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을 것이란 얘기도 나돌았다. 그러나 삼성측이 이번에 발표한 구조본 재편안에 따르면 재무팀과 기획팀 인력이 축소되고 홍보팀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인다. 홍보팀이 상대적으로 위상이 강화된다는 뜻이다.
홍보팀의 외형적 위상 강화는 삼성의 위기 돌파를 위한 대외업무 라인에 힘 실어주기 차원으로 해석된다. 특히 정치권 등 여론 주도층에 대한 ‘마사지’ 작업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으로 해석되고 있어 관심이 쏠린다. 현재 진행중인 금산법 개정 논의나 삼성 그룹 지배구조 논란의 큰 방향이 결국 정치권 분위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예측이 가능해진다.
삼성이 단순한 로비 차원을 넘어 정치권 내 ‘우군 세력’ 형성에 주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 7일 삼성의 사회환원 발표에 대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즉각 환영의사를 발표했으며 한덕수 경제부총리도 삼성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는 발언을 했다. 당·정·청이 이처럼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 것은 삼성이 마련한 이번 조치가 여권이 그동안 강조해온 ‘대기업 역할론’과 정확히 ‘코드’를 같이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이 때문에 여권과 삼성간의 사전교감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극구 부인하고 있다.
삼성과 한나라당의 관계도 주목받는다. 제주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얼마 전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에 이어 최근엔 삼성 구조본 고위인사와 한나라당 인사 간의 접촉설이 나돌고 있다. 이 인사는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 영입대상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정치권 인사들은 “이미 양측이 접촉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잘 모르는 일”이라면서도 “만약 그분이 영입되면 판이 재미있어질 것”이라 밝혀 가능성 자체는 배제하지 않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