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지난 4월 13일 LG상사는 갑작스레 와인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LG상사 관계자는 “지난 2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와인유통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분류한 것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고민해왔던 사안”이라며 “와인수입 자회사인 ‘지오바인’과 판매 자회사인 ‘트윈와인’ 두 곳 모두 사업철수를 결정했다. 이달부터 정리 작업에 착수해 상반기 중 관련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발표를 전후로 해 트윈와인이 수입하던 제품은 최대 90%까지 할인행사를 진행하며 실질적인 정리를 시작했다.
트윈와인은 ‘이영복 와인’ ‘허영만 와인’ 같은 히트상품을 비롯해 12개국 300여 브랜드의 비교적 다양한 와인종류를 보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청산보다는 매각으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높다. 한때 태광그룹이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태광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태광그룹은 지난 2008년 2월에 설립한 와인 수입업체 ‘바인하임’과 그해 8월에 설립한 도·소매업체 ‘메르뱅’을 보유하고 있으나 활발한 영업활동을 펼치진 않고 있다.
LG상사 역시 “아직 매각이나 청산 등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하지도 못했다. 다만 공식적인 경로가 아닌 개인적인 접촉은 있었다. 태광그룹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될 것”이라며 “회사를 정리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결정 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LG상사의 와인사업 철수 발표에 업계는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트윈와인은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이 LG상사 재직 당시 직접 지시해 시작했던 사업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직영점을 늘리고 수입 유통사 인수를 고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갑자기 철수를 발표해 모두가 어리둥절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물론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LG상사의 발표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업을 접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사실 국내 와인시장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며 “와인사업이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하지 않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의 여파도 생각해봐야 한다. 또 온라인시장까지 개방되면 판세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를뿐더러 기업이 사업을 철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준철 한국와인협회 회장은 “대기업이 뛰어들면서 와인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가격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 중소기업이 수입·판매하던 와인을 대기업이 중간에 가로채 판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대기업이 직접 현지로 찾아가 인지도를 내세워 자신들이 더 많이 팔 수 있다고 설득하니 중소기업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어 “국내 와인시장은 아직 소규모다. 한참 붐이 일었을 때 너도나도 뛰어들었으나 대기업이 만족할만한 수준의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면서 “결국 돈이 안 되니 사업을 접은 것이지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중소기업을 위하려면 모든 대기업이 일시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에 와인사업을 진행하는 대기업들은 애써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다.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대기업 빵집’ 사건이 되풀이될까 조심스럽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쪽이 우세하다. 괜한 불똥이 튀는 일은 피하겠다는 것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와인시장이 술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딱히 사업계획을 변경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며 “신세계L&B의 연간 매출은 170억 원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더욱이 이마트 백화점 조선호텔을 비롯해 몇 개의 외부레스토랑에만 공급되기 때문에 중소기업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도 없다”고 밝혔다.
SK네트웍스 관계자 역시 “사업시작부터 글로벌 와인사업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다. 국내에서 어느 정도 판매를 하고 있어야 해외에서도 와인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양새만 갖춰 놓았을 뿐”이라며 “국내에서는 본사와 워커힐 롯데백화점에서만 일부 우리가 수입하는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대기업 와인사업 성적표
6100만 원짜리 냉장고서 ‘쿨쿨’
LG상사처럼 대기업의 와인사업 진출은 오너의 의지가 적극 반영된 경우가 많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탄생시킨 신세계L&B나 평소 와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설립한 SK네트웍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성적표는 그리 돋보이지 않는다. 신세계L&B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와인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닌 마진 최소화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되돌려주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도 지난 3년간 눈에 띄는 성장을 기록하진 못했다.
특히 SK네트웍스는 지나치게 고가인 탓에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0년 SK네트웍스는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고급·희귀 와인을 한 자리에 모아 ‘올드앤레어(Old&Rare) 와인전’을 열었다. 이 행사에서 SK네트웍스는 200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1만 달러에 낙찰된 초고가 와인(병당 판매가 6100만 원)인 ‘샤토 무통 로칠드 1945년산’을 선보였다. 당시 국내로 반입된 와인은 총 12병. 판매 시작 전부터 1병이 예약 판매돼 국내에도 고가 와인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행사 전 예약 판매됐던 1병 외에는 아직까지 판매된 적이 없다. 현재는 롯데백화점 본점 와인판매 코너에 별도로 마련된 SK네트웍스 냉장고에 전시돼 있다”고 설명했다. SK네트웍스도 “우리는 해외 판매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판매사항에 대해선 정확히 알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