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합유통단지 파이시티가 들어서기로 돼 있던 양재동 화물터미널 용지 전경. 원 안은 조감도. 초대박을 터트릴 줄 알았던 이 초대형 사업권은 결국 남에게 넘어갔다. |
▲ 이정배 전 사장. |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보고 투자자를 모으는 금융기법인 PF는 당시에만 해도 국내에선 생소했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선 개발업자의 낮은 신용을 보강하기 위해 대형 건설사가 금융기관에 지급 보증과 채무 인수 등을 약속하면 은행권이 돈을 대주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 씨는 오랜 기간 건설업계에서 쌓아온 인맥과 기획력을 통해 PF를 이용해 쉽게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그는 다 합하면 조 단위 사업을 굴렸다.
그때쯤 그는 ‘가치부동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는 ‘뛰어난 입지, 대규모 부지, 명품 브랜드’, 세 조건을 갖춘 상품을 통해 고객 수요를 리드하겠다”며 “초대형 개발회사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힌다. 바로 그가 파이시티 부지를 사기 시작한 때다.
이 씨는 2004년 경매를 통해 양재동 화물터미널 부지 5만 4400㎡를 산다. 그게 파이시티 사업의 첫 삽이다. 당시엔 누가 봐도 유망한 프로젝트였다. 주변엔 현대차그룹 사옥과 LG전자 연구개발센터, 코트라가 있고 농협하나로클럽, 양재화훼단지 등 유통시설도 있었다. 신분당선이 뚫리는 등 대중교통 여건도 계속 좋아질 것이란 기대감도 컸다. 강남에 얼마 남지 않은 금싸라기 땅인 데다 규모도 컸다. 이 씨 말대로 내재가치가 큰 부동산의 전형이었다.
이 씨는 유통시설 부지지만 상업시설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2005년 말 심의를 통해 파이시티에 상업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전격 허용한다. 이게 현재 특혜 시비의 첫 발단이 된 사건이다. 그런데 당시 상업시설 허용에는 조건이 있었다. 바로 주변의 4만 4500㎡ 땅을 함께 ‘통합 개발’하라는 것이다.
서울시 조건에 맞춰 소유주가 다른 주변 땅을 추가로 살 경우 개발 면적은 10만㎡ 정도로 커진다. 당초 계획 대비 두 배 정도나 사업규모가 커지는 것이다. 개발에 성공할 경우 수익은 훨씬 늘어나지만 문제는 대출 규모가 늘어나면서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 씨는 2006년 서울시 요구대로 추가로 땅을 산다. 대출 부담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는 파이시티 사업을 위해 PF를 시작한 2003년께부터 우리은행과 2금융권 등으로부터 수천억 원의 대출을 받았다. PF대출은 돈을 빌린 순간부터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어떻게든 인허가를 빨리 받아 착공을 하고 분양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다. 2007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인허가가 2009년 말까지 나지 않으면서 갚아야 할 원리금은 1조 원이 넘었다고 한다. 연체이자는 당시 연 17%나 됐다.
이자만 하루에 수억 원씩 나오는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인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로비의 유혹이 커지는 구조다. 최근 각종 로비 의혹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씨는 최근 인터뷰에서 “2005년 말 서울시가 요구한 통합개발은 우리 사업에 약점을 만들었던 것”이라며 “뒷산까지 사서 개발을 하라는 건 우리를 낭떠러지로 모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개발 규모가 커지면서 인허가는 더 어려워졌고, 대출금은 늘어났다. 엎친 데 덮쳐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금융권은 2009년부터 부실 PF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에 지급보증을 선 시공사 대우차판매와 성우종합건설이 2010년 4월과 6월 각각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버팀목이던 시공사 보증이 사라지자 채권단은 파이시티를 대상으로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곽창석 나비에셋 사장은 “결과로만 따지면 통합개발이 사업을 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몰고 갔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초대형 개발 사업은 인허가 과정에서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지역 주민의 민원이 생길 수 있고, 토지보상, 설계 변경 등의 과정이 더 길어질 수 있다. 예상보다 몇 년씩 지연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2006~2007년 서울시에서 인허가를 받은 대형 프로젝트 가운데 비슷한 사례가 꽤 있다. 단군 이래 최대 개발 프로젝트로 꼽히는 서울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대표적이다. 코레일은 당초 보유하고 있던 용산 철도창 부지만을 대상으로 개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서울시는 한강 경관 개선사업을 고려해 서부이촌동의 12만 4000㎡를 포함해 ‘통합개발’을 하는 것을 인허가 조건으로 내세웠다.
▲ 서울 용산국제업무지구 조감도. |
박일한 중앙일보 조인스랜드 기자 jumpcu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