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차의 영업이익률이 전년이 비해 80%나 떨어지면서 정의선 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다. | ||
현대차그룹은 연초부터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해 매일같이 사원들에게 비용절감 교육을 하는 등 어느 때보다 허리띠 졸라 매기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구조조정 작업에 대한 원성을 모두 잠재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특히 이번 현대차의 구조조정 작업 과정에서 현대차 총수 일가에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이 없지 않아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차의 ‘제살 깎기’ 노력은 일단 과장급 이상 간부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전 현대차 과장급 이상 간부들은 올 임금 동결에 합의했다. 회사 영업이익률 하락과 환율 급락 그리고 유가 상승 등의 악재가 겹친 만큼 고통분담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합의했다는 것이 현대차측의 설명이다. 현대차 임직원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임금 30%를 회사측에 자진 반납한 전례가 있다.
게다가 현대차 주변에선 과장급 이상 인사들에 대한 구조조정 얘기도 계속해서 흘러나와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연초 비상경영 체제 선포 이후 과장급 이상 인사들을 대상으로 업무성과가 반영된 고과표가 이메일로 발송됐고 이후부터 권고사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재계에 파다하다. 업계의 한 인사는 “권고사직 통고문이 노란봉투에 담겨서 책상 위에 올려진다고 한다. 사내에서 ‘노란봉투의 공포’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업계 인사들이 전하는 ‘노란 봉투’에 관한 소문은 제법 구체적이다. 먼저 기아차에 권고사직 통고문이 담긴 ‘노란 봉투’가 등장했는데 이를 알게 된 노조가 즉각 반발해 무마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기아차 내부에 다시 ‘노란 봉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인사는 “노란 봉투로 인해 실제로 사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대신 다른 부문으로의 전보 형태로 인사조치가 행해졌을 것”이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 측은 극구 부인하고 나섰다. 현대차 관계자는 “연례적으로 사원들의 업무실적을 평가하는 작업이 있었을 뿐 권고사직 움직임은 절대 없다”고 못박았다.
과장급 이상 임원들의 임금 동결 선언에 ‘외압’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현대차 측은 “절대 아니다”고 부인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임금 동결 선언 당시 (정몽구) 회장님은 해외출장중이었다”고 밝혔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감안한 임원들의 자발적 행동이었음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 정몽구 회장. | ||
현대차는 원화와 유가, 재료비의 동반 상승 등 악재가 겹쳐 비상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선 현대차 총수일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특히 정몽구 회장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경영을 총괄하고 있는 기아차의 실적이 자주 거론된다. 기아차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전년 대비 80% 감소해 최악의 한해로 평가받았다. 지난해 매출은 줄었지만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낸 현대차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업계에선 정 사장의 기아차 지분이 늘어나고 경영 관여도가 커진 지난해에 오히려 기아차 영업이익이 감소한 점, 기아차에 판매 드라이브로 잡음이 일고 있는 점, 여기에 최근의 구조조정작업이 겹쳐지면서 현대차 그룹의 해법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대권승계를 눈 앞에 둔 정의선 사장이 경영실적을 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역풍’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사진의 보수 한도 조정에 대한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얼마전 정몽구 회장 등 이사진은 자신들의 보수 한도를 지난해 70억 원에서 올해 100억 원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비상경영 동참을 호소한 사측이 과장급 이상 간부들의 임금 동결 선언과는 따로가는 행보를 보인 셈이다.
현대차 등기이사진은 정몽구 회장과 김동진 부회장, 그리고 새로 선임될 예정인 윤여철 사장 등 사내 등기임원 3명과 사외이사 4명으로 구성돼 있다. 과장급 이상 임원들은 임금 동결을 선언하고 허리띠를 졸라 매는 사이 이사진 보수 한도 확대를 통해 소수 경영진의 임금이 대폭 인상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일각에선 환차손에 의한 현대차 위기경영 선언에 대해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미국 앨라바마에 설립한 현지공장 생산라인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어 업계에선 현대차가 대 북미지역 수출 과정에서 환율 급락에 따른 환차손 피해를 줄여나갈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현대차는 지난 2월 23일 알제리에서 5000억 원 규모의 상용차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는 등 수출세가 줄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차그룹 내부 분위기는 냉랭하다. 올 초 비상경영을 선포하며 김동진 부회장이 ‘마른 수건도 다시 짜자’고 말했던 것의 업그레이드 버전까지 사내에 등장했다고 한다. ‘쥐어짤 때 더 힘 줘라’는 말이 나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말 긴급재난 구호전문 봉사단을 발족하고 본격 활동에 나섰다. 삼성의 8000억 원 사회 출연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자원봉사활동에 나서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깥으로 온정의 손길을 펼치는 사이 그룹 내부는 재계 어느 곳보다 더 추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