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지주회사설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된 계기는 삼성물산의 ‘자사주 매입’ 발표였다. 삼성물산은 지난 3월 20일 공시를 통해 ‘4월 3일까지 자사주 신탁을 해지한 뒤 자사주 취득을 제한하는 기한인 3개월이 지난 이후 자사주 취득을 적극 검토할 예정’이라 밝혔다.
그동안 삼성물산은 자사 주식 201만 주(평가액 420억 원)를 3개 증권사의 7개 계좌에 나눠 신탁 관리해왔다. ‘자사주펀드’로 일컬어지는 신탁관리를 통해 다른 투자기관에 의해 관리돼 온 삼성물산 자사주를 이제부터 삼성물산 명의로 전환해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 인사들은 ‘경영권 방어’ 조치의 일환으로 해석한다. 지금까지는 외부기관이 삼성물산 자사주를 대신 관리하면서 ‘재투자를 통해 돈을 불려나가는 식’이었다. 그러나 투자를 포기(?)하는 대신 외부기관 명의로 된 삼성물산 소유 자사주를 삼성물산 명의로 일원화하면서 경영권의 안정적 방어를 도모하려 한다는 평이다.
KT&G가 외국계 기업사냥꾼인 칼 아이칸의 경영권 위협에 놓이자 업계에선 삼성물산에 대한 외국자본의 적대적 M&A(인수 합병) 위험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삼성계열사들과 우호세력이 가진 삼성물산 지분을 다 합쳐도 13.5%에 불과한 반면 외국인 지분은 31.9%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 측은 “지금의 자사주 매입을 경영권 방어로 직접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밝힌다. 삼성물산이 외부 기관에 수탁해온 201만 주는 지분율 1.3%에 해당한다. 경영권 방어를 운운할 만큼의 큰 비중은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지분 관리의 일원화와 효율성 극대화 차원에서 매입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삼성물산의 이 같은 해명에도 업계 인사들은 경영권 방어 차원을 넘어서 아예 ‘삼성물산이 그룹의 지주회사로 전환될 것’이란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삼성물산에 대한 지주회사 소문은 이미 지난 2월 삼성의 대국민 사과성명 직후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 안팎에선 ‘구조본 소속 법무실이 삼성물산에 배속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던 바 있다. 이는 결국 법무실이 구조본에서 분리돼 사장단 회의(수요회)의 자문기구로 되면서 ‘삼성물산행’소문도 가라앉게 됐다. 그러나 삼성의 향후 지배구조 변화 과정에서 ‘삼성물산이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는 업계 인사들의 공통된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난 2월 국회 상임위에서 금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대한 어느 정도 손질이 예상되고 있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그룹 내 금융계열사와 비금융계열사가 의결권 행사 가능한 서로의 지분을 5% 이상 가질 수 없게 된다.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 금융계열사들을 중심으로 순환지배구조를 꾸려온 삼성그룹 입장에선 묘안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탓에 특정 계열사가 주요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해 지주회사 형태로 거듭나는 방안이 삼성 안팎에서 거론돼 왔다.
LG의 (주)LG처럼 지주회사 역할을 하려면 주요 계열사 지분을 일정량 갖고 있어야 한다. 현재 삼성그룹 내에서 계열사들의 지분을 두루 보유하고 있는 주요계열사는 삼성물산뿐이다. 삼성전자(3.48%)를 비롯해 삼성정밀화학(5.59%) 삼성증권(0.27%) 삼성테크윈(4.28%) 제일기획(12.64%) 등 주요 상장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다. 비상장 계열사로는 현재 지배구조 중심에 있는 삼성에버랜드(1.48%)와 삼성카드(3.18%)를 포함해 삼성SDS(17.96%) 삼성네트웍스(19.47%) 삼성테스코(11.0%) 삼성종합화학(13.05%)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물산의 계열사 지분 보유 현황은 금산법 개정안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삼성물산이 보유한 상장 계열사 지분가치는 3조 4000억 원에 육박하며 이는 삼성물산 주식 시가총액 3조 8000억 원과 맞먹는다. 특히 계열사 지분가치 3조 4000억 원 중 삼성전자 지분에 대한 가치가 3조 원에 육박한다. 증권가에선 “삼성물산 주식 매입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이야기도 나돌 정도다. 현재의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 삼성전자 중심의 순환지배구조의 대안으로 지주회사제를 도입할 경우 삼성물산만한 적임도 없는 셈이다.
업계의 한 인사는 “그동안 외부기관에 수탁관리해온 자사주 201만 주를 갑자기 삼성물산 명의로 매입해 관리하는 체제로 가면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 효율성을 무시한 채 자사주 관리를 해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라 밝힌다. 이번 자사주 매입 결정은 삼성물산이 주장하는 효율성이나 일원화보다는 ‘지주회사로 가는 절차’로 봐야 한다는 것이 여러 재계 인사들의 견해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 측은 “개인도 필요에 따라 현금으로 보유할 수도 있으며 주식 부동산 혹은 고가품 매입 등에 투자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그동안의 자사주펀드는 수익성을 고려했던 것이며 지금은 그 수익성보다 관리의 일원화가 낫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삼성물산이 여러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는 건 맞지만 지주회사가 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고 덧붙인다. 지주회사제로 전환하려면 더 많은 지분 정리 작업과 변화가 필요한데 현재의 자사주 매입을 놓고 지주회사제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