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배우 정성일(43)이 연기한 하도영이라는 캐릭터는 극중에서 '나이스한 개새끼'란 문장으로 정의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329/1680069307022953.jpg)
"'더 글로리' 촬영 중간에 김은숙 작가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혹시 하도영이란 인물을 쓰시면서 생각하신 이미지나 다른 배우가 있으셨냐고요.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냥 너였어'. 의아했죠. 저를 대체 왜요(웃음)? 작가님이 (윤)세아 누나 때문에 '비밀의 숲 2'를 보셨는데 거기 나온 저를 보시고 '하도영은 무조건 쟤야' 하고 쓰신 거래요. 왜 하필 저였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죠(웃음)."
'더 글로리'에서 정성일이 연기한 하도영은 딱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정의된다. '나이스한, 개새끼'. 지독한 학교폭력으로 영혼마저 훼손된 여자 문동은(송혜교 분)이 마련한 복수의 길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그는 문동은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남편이다. 준재벌급의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완벽한 가정도 소유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감정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린 듯한 소시오패스적 면모를 보이는 '쎄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은숙 작가가 처음부터 자신을 하도영으로 점찍었다고 강조했어도 의아함을 떨쳐내지 못했던 데엔 이 같은 하도영의 양면적인 모습 탓이 컸다는 게 정성일의 이야기다. "나이스면 나이스지, 개새끼는 뭘까요?" 대본을 받은 날부터 이 고민이 계속됐다며 정성일은 웃음을 터뜨렸다.
![김은숙 작가는 '더 글로리' 집필 당시 처음부터 정성일을 하도영 역으로 점 찍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넷플릭스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329/1680069443921426.jpg)
특히 국내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끈 작품이기 때문인지 '더 글로리'는 파트1이 마무리된 뒤 파트2를 기다리는 한 달여 동안 열혈 시청자들 사이에서 결말을 예측하는 글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기도 했다. 김은숙 작가가 매 신마다 심어 놓은 복선과 심지어 홍보 포스터에 들어간 의미심장한 상징까지 심도 깊은 해석도 이어졌다. 배우들 역시 시청자들의 날카로운 추리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정성일이 용납하지 못한 딱 한 가지 추측이 있었다고 했다. '하도영 무정자 설'이다.
"‘하도영이 무정자증이라 예솔이가 자기 딸이 아닌 걸 처음부터 알았다’는 말에 좀 당황했죠. ‘아니 내가 왜?’ 이러면서(웃음). 대체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보였나…. 그리고 포스터를 보고 결말을 해석하셨던 분들이 계셨는데 저희도 (그런 상징이 담긴 걸) 몰랐었어요. 넷플릭스에서 처음부터 의도를 하고 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작가님도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열어놓고 파트1을 끝내셨던 것 같아요."
![자신의 딸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예솔의 아버지로 남기로 결심한 하도영의 결심에는 배우 정성일의 경험이 담겨있었다.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 스틸컷](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329/1680069532073560.jpg)
"저도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애기 때부터 일하는 시간 외엔 다 육아에 집중하다 보니 애 하나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그런데 힘든 만큼 애가 커가는 걸 보면 또 정말 뿌듯하거든요. 그래서 하도영에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어요. 그의 입장에선 자기의 모든 걸 덜어내고 대할 수 있는 생명이 바로 예솔이었을 테니까요. 드라마를 보시면 하도영이 유일하게 가장 환하게 웃을 때가 예솔이를 만날 때예요. 그 정도로 다 내려놓고 아이를 보며 웃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기른 정을 선택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게 선택의 충분한 이유가 됐을 거고요."
그런가 하면 연진의 악행을 이미 다 알고 난 뒤에도 그의 곁에 머물 것을 선택했던 하도영의 파트2 초반 태도에는 의견이 갈렸다. 동은이 '연진의 곁에 단 한 명도 남기지 않는다'는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을 알면서도 연진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동은을 더 오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던 것. "하도영은 진심으로 박연진을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이 전제되는 이 해석에 대해 정성일은 사랑과 더불어 도영이 연진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곁에 남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성일은 하도영이 문동은에게 느낀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https://storage1.ilyo.co.kr/contents/article/images/2023/0329/1680069636167119.jpg)
그렇다면 '사약 케미'로까지 사랑 받은 동은과의 감정 흐름은 어땠을까.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뽑아 놓은 것 같은 둘의 첫 만남부터 감정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며 시청자들은 이들의 '위험한 로맨스'를 티 나지 않게 응원하기도 했다. 비록 동은은 도영을 그저 복수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쓰고 말았을 뿐이었지만, 도영은 어느 정도 동은에게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이 질문을 놓고 정성일은 캐릭터 하도영과 인간 정성일이 느끼는 감정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저는 두 사람의 결말, 딱 거기까지가 좋았어요(웃음). 동은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도영이란 사람을 이용의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하도영이 더 나아갔다면 이건 또 명확한 불륜이 돼 버리니까요(웃음). 인간 정성일은 상대에게 호기심이 생기고, 설레고, 숨 막히게 하는 뭔가가 생긴다면 그걸 사랑으로 느낄 것 같은데 하도영은 그런 걸 사랑으로 인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마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바로 거기서 멈췄겠죠."
처음 출연 제의를 들었던 날로부터 대본 리딩까지 꼬박 1년, 그리고 약 7개월 동안 이어진 촬영과 완성된 작품의 완전한 공개가 이뤄진 시간이 약 2개월여. '더 글로리'의 세상에서 2년 가까이를 보냈던 정성일은 요즘 대학로에서 연극 '뷰티풀 선데이'와 뮤지컬 '인터뷰' 공연에 한창이다. 그의 오랜 팬들에게 특히 더 친숙한 무대로 돌아간 정성일은 '더 글로리' 이후로 쏟아지는 러브콜에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말을 강조했다. 배우로서 지나온 20년 시간을 되새겨 봐도 결국은 다시 기본을 택하게 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여전히 저는 무대가 너무 좋아요.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은 늘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무대 활동은 계속 할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한 번 작품 하나로 소비했으면 에너지를 새롭게 또 채워야 하거든요. 무대는 제게 있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밥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웃음). 앞으로 또 어떤 캐릭터,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대에서 공연함으로써 제가 배운 것들을 덧입힐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