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 피해 인정하지만 범행 반복 죄질 안 좋아” 징역 2년…주범 ‘김 팀장’ 일당은 여전히 행방 묘연
#'영상이 가족한테도 유포'…피해자에서 가해자로
태어나자마자 부모한테 버려진 최영재 씨(가명·27)는 친척들 밑에서 자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탓인지 대인관계는 원만치 못했고 우울증과 감정 조절 장애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성인이 돼서는 갖은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늦은 밤 유흥업소에서까지 일하는 등 부지런히 삶을 버텨갔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던 가난의 늪, 그는 생계급여 등으로 간신히 생활을 영위했다.
최 씨가 '김 팀장'을 처음 알게 된 때는 2023년 1월 말이었다. 급하게 200만 원이 필요해 한 대부업체에 전화를 걸면서 '인생 악연'이 시작됐다. 업체의 담보 요구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히 대답한 게 발단이었다. 이때 '나체 영상'으로 담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 바로 김 팀장이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절차였지만, 최 씨는 급박함 때문인지 우울증이 원인인지 판단력이 흐려져 영상을 보내고 말았다.
나체 영상까지 보냈건만 상황은 최 씨 바람과 정반대로 흘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대출 불가'라는 심사 결과가 전해졌다. 울분을 토로하는 최 씨에게 김 팀장은 안쓰러운 척 다가왔다. 그리고 솔깃한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대출 상환금을 받아오면 5만~20만 원의 수수료를 떼어주겠다'는 것. 상환을 미리 약속한 고객한테서 현금만 받아오면 돼 어렵지 않다고 다독이기도 했다.
그렇게 최 씨는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을 갔다. 2월 24일 기어코 첫 상환금을 받기 위해 부산에서 경남 산청군까지 향했다. 한 노인회관 앞에서 첫 고객과 만나 OO저축은행 직원인 척 신분을 속이고 1480만 원을 받아왔다. 그리고 25만 원을 일당으로 챙겼다. 다만 택시비만 12만 원이 들어 실제 쥔 돈은 13만 원 수준이었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 뒤로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3월 중순까지 부산·창원·진해 등지에서만 다섯 차례에 걸쳐 총 1억 784만 원을 거둬들였다.
그의 실제 역할은 보이스피싱 사기의 수거책이었다. 최 씨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멀쩡한 일이라면 신분을 속일 필요가 없다. 특히 그는 받아온 돈을 김 팀장 등 여러 일당에게 50여 차례에 나눠 송금했다. 주로 편의점 ATM(현금자동입출금기)를 이용했는데 인적 사항에는 자신도 모르는 낯선 정보를 입력했다. 최 씨 스스로도 '몹쓸 짓'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에겐 일을 멈추기 어려웠던 까닭도 있었다. 담보 명목으로 건넨 나체 영상이다. 김 팀장 등 정체불명의 '회사 사람들'은 걸핏하면 이를 빌미로 협박을 일삼았다. 돈을 제대로 못 받아왔다며 "내 말이 우습냐" "지금부터 보여주마" 등의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게다가 최 씨를 친자식처럼 키워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영상을 실제로 유포하기도 했다. 친척들에 날아간 문자에는 "영상 확인했죠?" "당신 자식 영상 전국에 퍼트리겠다" 등의 협박이 잇따랐다.
#영상협박·심신미약 호소했지만…"죄질 안 좋다" 실형
최 씨는 3월 중순 울산에서 범행을 저지르다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상 협박 피해자'에서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경찰에 입건됐으나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은 탓에 바깥에서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결국 또 현행범 체포돼 구속됐다. 이후 검찰로 넘겨진 그는 "동영상 협박이 무서웠다"면서도 "조금만 더 벌자는 마음에 신고를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검찰은 최 씨를 사기와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공소장을 통해 "성명불상의 보이스피싱 조직원 등과 공모해 중대사기범죄인 사기죄를 저질렀다"며 "금융기관 직원으로 행세하며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교부 받고 범죄 수익의 취득 및 처분하는 등의 행위에서도 여러 사실들을 거짓으로 꾸며냈다"고 강조했다. 이에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법정에 선 최 씨는 동영상 협박 피해와 우울증 등 심신미약, 불우한 성장한 환경 등을 참작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5월 3일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형사1단독 한종환 부장판사는 최 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한 부장판사는 "보이스피싱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만큼 중대한 범죄로서 최 씨는 한 차례 체포되고도 범행을 반복하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며 "나체 영상으로 협박은 받은 사실은 피고인에 유리한 정상"이라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동영상 협박 등을 저지른 김 팀장 일당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최 씨와 연락을 나눈 번호가 전부 가짜인 데다, 텔레그램 기록 등도 삭제돼 추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사 당국은 일당이 중국 등 해외에 머무를 것으로 추정하지만 실체와 소재 파악은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보이스피싱을 전담 수사하는 한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의 조직이 중국에 머무르지만 그곳에서도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고, 수십 수백 개의 이동식 발신번호 조작기를 활용해 추적이 쉽지 않다"면서도 "다만 보이스피싱은 초범도 실형이 나오는 추세로서 경찰 역시 범죄의 뿌리를 뽑는 데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만큼 시간문제일 뿐 결국엔 검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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