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 소환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지난 20일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검찰의 다음 칼날이 어디를 겨눌지 궁금해진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러나 총수일가가 1조 원 사회헌납을 결정하고 순순히 검찰 소환에 응한 과정을 지켜보는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총수일가에 대한 사법처리가 극단적 수준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검찰과 현대차가 벌이는 ‘속도전’ 때문이다.
현대차에 대한 검찰 수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다. 현대차 임원진과 총수일가에 대한 처벌 수위도 4월 안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조속히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검찰의 수사 초기 방침에 따른 것이다. 도피성 출국 논란에 휩싸였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오랜 외유를 마치고 돌아와 8000억 원 사회헌납을 발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대차그룹은 1조 원 사회헌납 발표를 조속히 단행했다. 삼성의 경우처럼 ‘총수일가 소환 불가’라는 말은 거론될 틈조차 없었다. 총수일가 소환에 앞서 검찰조사를 받은 김동진 총괄부회장의 경우 소환-긴급체포-석방 수순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검찰과 현대차는 극구 부인하지만 여러 정황을 두고 양측 간에 어느 정도 조율이 이뤄졌다는 관측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일단 강경방침을 천명한 상태지만 삼성전자와는 달리 현대차가 휘청거리면 여러 하청업체들도 큰 타격을 받는다는 점을 수사당국이 적극 고려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검찰과 현대차 양측의 ‘속도전’을 지켜보는 검찰 주변 인사들은 진행 중인 현대차 비자금 용처 수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비자금 조성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면 자연스레 용처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검찰은 용처 수사를 연말까지 진행할 것으로 관측된다.
통례로 보면 재벌의 비자금 용도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총수 일가의 사적인 용도이고 둘째는 정계나 관계로 흘러들어가 사업의 ‘윤활유’로 쓰이는 경우다.
검찰 주변에선 현대차 비자금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정·관계로 유입된 비자금 규모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는 정·관계를 폭풍전야로 만들고 있다. 벌써부터 여러 거물급 정치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특정 정파가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그렇다면 비자금을 받은 정·관계 인사들도 검찰청에 불려오게 될까. 코앞에 닥친 5·31 지방선거가 검찰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과 재계에서 거론되는 비자금 관련 정·관계 인사들의 면면이 만만치 않은 데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중립성 문제가 불거질 경우 검찰이 정치적 부담을 떠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 가능성도 있다. 현재 청와대에 파견나간 검사가 없다. 청와대에서 검찰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검찰 주변에선 요즘 ‘검찰의 정의감’을 말릴 데가 한군데도 없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과거와 같은 ‘통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도 걸려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힘이 세진 검찰은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또 현대차 비자금 문제를 수사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와 윤상림 게이트에서 촉발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건, 신세계 후계 문제, 재벌가의 사위인 이동욱씨 구속 건을 집행해온 서울중앙지검 간에 ‘선명성’ 경쟁이 붙을 경우 ‘강직한 검찰론’이 득세할 가능성도 크다. 윤상림 게이트가 ‘태산명동 서일필’ 형국으로 끝난 뒤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재벌 수사에선 예외가 많았다. 삼성의 후계자 이재용 씨의 편법 상속 문제나 엑스파일 사건, 두산총수 일가의 회사 자금 횡령 사건에서 보듯 재벌가 인물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
이런 탓에 일각에선 현대차의 비자금 용처에 관한 수사가 진행되는 한편 김재록 게이트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사건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게 거론되고 있다. 현대차에 이은 김재록 게이트 2탄의 타깃은 금융권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수사당국 주변에서 제2금융권 A 사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이 번져나가고 있다. 특히 A 사의 사장인 B 씨와 김재록 씨 간 친분이 논란거리가 될 전망이다. 수사당국이 B 씨가 김재록 씨 구속 직전까지 어울렸던 정황을 포착했다는 소문도 있다. 검찰청사 주변엔 ‘B 씨가 김재록 씨에게 A 사의 신용카드를 만들어주고 대신 결제해줬다’는 이야기마저 나돌고 있다.
▲ 정상명 검찰총장 | ||
타사 임원 출신인 B 씨는 지난 2004년 A 사 사장직에 올라 대규모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부진한 경영상태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식의 내부 불만을 양산했다고 전해진다.
B 씨에 불만을 품은 내부 인사들은 진작부터 업계에 B 씨와 김재록 씨 관련 이야기를 풀어놓은 상태다. 수사당국이 이미 김재록 씨를 통해 B 씨에 대한 정황을 포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수시 인사가 결국 내부 제보자를 만든 원인이 됐다’는 관측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셈이다.
검찰의 수사는 A 사를 포함한 금융계 전반으로 뻗어나갈 전망이다. 검찰은 현대차 계열사의 채무를 탕감해준 혐의로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와 이성근 산은캐피탈 사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바 있다. 법원이 이들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지만 검찰은 보강수사를 통해 빠른 시일 내에 재청구할 계획이다. 지난 4월 18일 검찰은 박상배 전 부총재의 서울 대치동 집을 전격 압수수색하며 강력한 수사 의지를 드러냈다. 검찰은 이들과 김재록 씨와의 연결고리를 포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수사는 김재록 게이트 수사 초기부터 거론된 ‘모피아’(재경부 출신 고위 인사들) 인맥으로 확전될 전망이다.
검찰의 총구가 과연 ‘이헌재 사단’을 향해 갈지도 관심사다. 검찰은 김재록 씨가 산업은행을 비롯해 금융감독원과 자산관리공사 고위 인사들에게 로비를 벌인 정황을 포착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조만간 전현직 금융권 고위인사들이 검찰에 줄줄이 소환될 가능성마저 검찰청사 안팎에서 거론된다. 검찰의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론스타와의 계약을 주도했던 ‘이헌재 사단’이 수사당국에서 거론되는 빈도가 높아질 수 있다. 만약 검찰의 수사가 ‘이헌재 사단’에 정조준될 경우 이는 현 정부 세력과 김대중 정부 인맥간의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때문에 김재록 게이트와 론스타 사건의 접점이 어느 곳이 될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를 겨누게 될지에 검찰청사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인사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