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 ||
롯데는 현금 재벌로 유명하다. 돈이 많다는 얘기다. 또 사업분야마다 1등을 노린다. 식품이나 호텔 등 롯데가 하는 모든 분야가 그랬다. 백화점을 포함한 유통분야에서도 사업 개시 이래 1등을 차지했지만 최근 몇년간 1등 자리가 위태위태하다. 90년대 이후 유통업의 꽃으로 불렸던 할인점 분야에 굼뜨게 대응했다가 라이벌 신세계가 외형에서 20여 년 만에 롯데를 누르는 ‘이변’이 생긴 것.
그러자 롯데 황태자 자리를 예약한 신동빈 부회장이 새로운 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롯데쇼핑을 상장해 엄청난 자금을 모으고 이를 할인점 사업 확대에 쓰겠다고 나선 것. 자체 자금이 넘쳐난다며 주식시장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롯데에 차세대 선장으로 예약된 신 부회장이 새로운 솜씨를 보이겠다며 등장한 것이다.
마침 시장에 한국까르푸가 매물로 나왔다. 시장에선 당연히 롯데가 가져갈 줄 알았다. 롯데가 돈도 많았고 의욕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된 밥’인 줄 알았던 롯데의 까르푸 인수는 무산됐다. 정부의 해외자본 세무조사설에 쫓기던 까르푸는 롯데보다는 속전속결로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이랜드를 파트너로 골랐다. 현금으로 무장한 롯데의 광폭 행보에 쫓기던 신세계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복병으로 등장한 이랜드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롯데는 소리만 요란했지 얻은 게 없다.
새로운 롯데를 디자인하려던 신동빈 부회장의 행보에도 브레이크가 걸린 셈이다.
롯데그룹은 올해 초 향후 2∼3년 안에 43개인 할인점 수를 70개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더불어 롯데쇼핑을 상장하면서 3조 원이라는 풍부한 자금을 마련해 해외 진출과 국내 할인점 확대에 필요한 실탄으로 비축해 놓은 상태였다. 실탄도 충분했고 인수하겠다는 의지도 충만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랜드라는 뉴페이스가 까르푸를 채간 것이다.
그만큼 까르푸의 이랜드 선택은 의외였다. 롯데쇼핑이 까르푸 인수를 접게 된 것은 한국까르푸가 직원 100% 고용승계, 입점 매장 유지 등 롯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조율이 끝내 무산됐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까르푸는 임대매장이 많아 수익성이 낮은 데다 까르푸가 국내 철수를 앞두고 노동조합과의 마찰을 줄이려다 보니 노조의 요구를 대거 수용해 직원들의 직급이 전체적으로 올랐고 외국계 기업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관리가 느슨해졌다고 한다. 이런 점을 근거로 롯데가 인수가격을 낮추려고 했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까르푸 직원들이 노동강도가 센 롯데마트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결국 롯데마트도 실사 과정에서 이러한 점이 걸림돌이 되자 한국까르푸를 무리하게 인수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일부에서는 한국까르푸가 세금 논란이 불거지고 외국 자본에 대한 과세를 위한 개정안 입법을 앞두고 있어 급히 매각하다 보니 시간을 끄는 롯데쇼핑보다 많은 금액(1조 7500억 원)을 제시한 이랜드에 매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롯데그룹 측은 “원래 자체적으로 할인점 확대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 매물로 까르푸가 나왔기 때문에 인수를 고려한 것이지 무리하게 인수하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롯데에선 애초 제시가격도 롯데가 이랜드에 비해 결코 높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홈쇼핑 인수를 계획했던 롯데는 최근 매물이 없는 상태라 이에 대해서는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라며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홈쇼핑과 농수산홈쇼핑이 인수 대상이지만 현재 우리홈쇼핑은 현 대주주인 경방과 태광이 지분확보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등 여의치 않은 상태다.
한편 까르푸 인수 과정에서 분당 야탑점이 변수로 등장해 향후 다시 인수전이 불붙을 가능성도 있다. 까르푸 야탑점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 7월 경매에 나오는데 이 건물을 인수한 업체가 임대점포인 까르푸 야탑점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야탑점은 까르푸 매장 32개 중 가장 영업이익이 많이 나는 곳으로 충분히 매력이 있다. 롯데쇼핑 등 할인점 업체들이 욕심을 낼 만한 곳이다.
롯데는 올해 초 유통분야 외에도 석유화학 부문에서도 견고한 사업영역을 구축한다는 전략을 세운 바 있다. 지난 2004년 7월 KP케미칼을 인수한 롯데는 호남석유화학, 롯데대산유화, KP케미칼을 ‘롯데그룹 신성장동력 3사’로 소개할 만큼 공을 들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롯데가 에쓰오일 자사주 매입 주체로 강력히 떠오르고 있다.
에쓰오일은 이에 대해 김선동 에쓰오일 회장이 3월 30일 주주총회에서 개인적 의견을 밝힌 것일 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롯데그룹 측도 “현재로선 고려하고 있지 않다. 2004년 에쓰오일 매각을 위해 접촉한 업체들 중 하나이다 보니 롯데 이름이 거론되는 것 같다”는 반응이다. 호남석유화학도 “석유화학과 정유산업은 성질이 다른 사업으로 시너지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며 인수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원료 확보 및 그룹의 위상 확보 차원에서 롯데가 에쓰오일 인수를 고려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 지분 35%를 가진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재벌인 아람코와 공동경영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힌다. 에쓰오일 자사주 28.4%(3198만 주)의 가격은 2조 3000억 원(주당 7만 2800원 기준)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롯데가 유통과 석유화학 부문 동시 확대를 위해서는 롯데건설을 상장할 것이라는 추측이 돌기도 한다. 롯데건설 측은 “자금력이 양호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상장설을 부인했다. 롯데그룹 측도 자금력이 우수한 롯데건설을 굳이 상장해 상장유지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현재로서는 롯데그룹도 까르푸 인수가 무산된 상황이라 당분간은 상장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는 상황이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부회장이 그룹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중화학 공업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석유화학 부문에서 M&A를 활발히 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올해 초 롯데쇼핑 상장을 통한 할인점 사업 확대도 신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IR을 지휘할 정도로 공을 기울이고 있다. 신 부회장이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그룹을 장악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