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동생’정몽준 의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시삼촌’정상영 KCC 명예회장(왼쪽부터) | ||
다급해진 현 회장은 공개적으로 “정몽준 의원과 만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현 회장이 신경을 기울여야 할 사람이 시동생뿐만은 아닌 것 같다. 지난 2003년 이른바 ‘시숙부의 난’을 통해 현대그룹 경영권을 위협했던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 또한 현 회장의 경영권 사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KCC는 갖고 있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외국계 자본인 쉰들러 측에 전량 매각하면서 현대그룹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법인이다. 당시 이 일은 정상영 명예회장의 현 회장에 대한 ‘물먹이기’ 시도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후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이자 ‘정상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이 현정은 회장 축출에 합의했다’는 소문으로까지 확대됐다.
정상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은 삼촌-조카 간의 끈끈함 외에도 KCC와 현대중공업 간 지분 거래에서도 역시 ‘찰떡궁합’임을 과시하고 있다. KCC는 지난 2월 자사주 52만 6000주를 처분했는데 이를 사들인 곳이 바로 현대중공업의 계열사다. 이를 통해 KCC가 벌어들인 금액은 1112억 원이었다.
지난 3월 KCC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각 발표 이후 5월 15일에 이를 공시했는데 매각으로 거둬들인 금액이 1255억 원이다. 최근 몇 달 사이 KCC는 지분 매각을 통해 총 2367억 원가량의 실탄을 확보한 셈이다.
그렇다면 KCC는 2000억 원을 크게 웃도는 이 자금을 어디에 쓰려 할까. 재계에선 이 정도 금액이면 현재 현대상선 지분 구조를 흔들어 놓을 용도로 쓰이기에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현대중공업과의 공조를 전제로 한 관측이다.
현대상선은 5월 18일부터 유상증자를 시작했다. 유상증자 주식 수는 3000만 주이며 발행가는 1만 4000원이다. 현재 현대중공업과 KCC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율 상태에서 변동 없이 유상증자에 참여할 경우 현대중공업 지분은 기존의 26.68%에서 25.48%로 떨어지고 KCC 지분율은 6.26%에서 5.98%로 감소된다.
반면 현정은 회장 우호지분은 37.73%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유상증자될 3000만 주 중 20%인 600만 주가 우리사주로 배당됐는데 유상증자 후 조성될 우리사주 지분 8.23%를 현 회장에 대한 우호지분으로 볼 수 있으므로 37.73%가 나오게 된다.
KCC 정상영 명예회장이 지난 2003년의 경영권 분쟁을 떠올리며 이번에 확보한 현금 2367억 원을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쏟아 넣으면 어떻게 될까. 현대상선 유상증자 발행가 1만 4000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매집할 수 있는 주식 수는 1690만 주에 이른다. 이를 유상증자 직전까지 KCC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상선 지분(645만 주)과 합하면 2335만 주가 된다. 유상증자 후 전체주식 총수(1억 3300만 주)로 환산하면 무려 17.55%에 이른다. 유상증자 참여 후 현대중공업 지분 25.48%와 합하면 43.03%가 된다. KCC가 현대중공업과의 공조 하에 최근 벌어들인 현금을 모두 현대상선 지분 확보에 쏟으면 유상증자 후 37.73%의 우호지분 확보에 그칠 현 회장의 경영권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셈이다.
정몽준-정상영 연합이 최대한 돈을 풀어 현대상선 지분을 43.03%까지 확보한다면 37.73%의 현 회장보다 5.30% 앞서게 된다. 이럴 경우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 회장은 얼마를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유상증자 이후 주식총수 1억 3300만 주로 환산하면 5.30% 지분은 718만 2000주에 해당한다. 유상증자 발행가 1만 4000원에 대입해 계산해보면 현 회장이 동원해야할 현금은 1005억 원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는 수치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다. KCC가 현대상선 지분 획득에 잉여자금을 전량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없다.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현대중공업과 KCC 간에 ‘역할분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또 현금을 지렛대로 쓰지 않고 전액 현금으로 전장에 투입할 가능성도 통례상 극히 낮다.
어쨌든 정상영 명예회장 측이 확보하고 있는 실탄 규모가 현 회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한 수준임은 분명해 보인다.
KCC가 확보한 2367억 원의 용도를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에 대입해 볼 수도 있다.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지분 8.69%를 보유하고 있어 현대그룹이 현대상선 유상증자를 ‘안전하게’ 끝내더라도 현대건설 지분을 현대중공업에 빼앗기면 힘들게 지켜온 현대상선 지배권도 멀어진다. ‘현대건설 인수를 통한 정통성 확보’라는 현 회장의 꿈도 접어야 한다.
과연 이 과정에서 KCC는 어느 정도의 ‘고춧가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5월 18일 현재 현대건설 주가는 4만 9450원이며 발행주식 총수는 1억 900만 주다.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2367억 원으로 KCC가 치지할 수 있는 현대건설 지분은 총 478만 주가 된다. 현대건설 지분율 4.38%가 된다. 현대중공업-KCC 연합이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인수전을 치를 것이라 상정할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수치다.
재계에선 KCC의 2367억 원 실탄이 현대상선 유상증자 참여와 추가지분 획득 용도보다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에 쓰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현재까지 현대중공업 측이나 KCC 측은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KCC가 최근 몇 달간 확보한 현금이 현대상선과 현대건설 지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현 회장이 식은땀을 흘리게 할 만한 수준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KCC측의 잉여자금 2367억 원 중 1112억 원이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계열사에 의해 만들어진 금액임을 감안할 때 정상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의 공조 실현 여부가 현정은 회장에게 얼마나 큰 압박으로 작용할지를 가늠케 해준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