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기아차 사장 | ||
정몽구 회장 구속 직후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법정에 피고인 자격으로 나란히 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게 된 현대차그룹의 중심에 정 사장이 우뚝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룹 내부가 정 사장 중심 체제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는 평이 흘러나온다. 아버지인 정 회장 구속 직후 정 사장은 거의 매일같이 정 회장과의 면회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회사 경영에 반영하는 역할을 맡으며 그 위상을 높여 왔다. 이제 검찰수사라는 족쇄마저 풀린 상황이라 정 사장의 후계 행보에 가속이 붙을 것이란 전망이다.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 수감돼 부재중인 그룹 내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사장은 이미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현대차그룹의 후계자다. 그는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이며 지난해 수시인사 과정에서 초고속 승진을 통해 기아차 사장직에 올라 2인자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정 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해선 이런저런 말도 많았다. 지난해엔 정 사장이 사장직에 있는 기아차가 전년대비 실적 저하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후유증 탓인지 올 초 현대·기아차 내부에서 감원설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직원들 사이에 정 사장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 구속 직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정 사장은 매일같이 정 회장을 면회하며 주요 업무 지시를 받아 그룹 경영에 반영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 사장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이 김동진 총괄부회장과 김승년 구매총괄본부장, 이정대 재경본부장 등 그룹 핵심 임원들은 모두 불구속 기소돼 검찰 수사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상 그룹 진두지휘권을 정 사장이 맡게 된 셈이다.
▲ 비자금 사건 등과 관련하여 지난 4월 19일 현대차그룹 임원들이 대국민 사과문과 1조 원 사회 환원을 발표한 뒤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정 회장 구속 이후 현대차 법무팀이 총력 대응을 펼치면서 검찰과의 줄다리기 속에 ‘정 사장 불구속 기소, 현대차 핵심 임원 처벌 최소화’가 대세로 자리잡은 듯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아들의 안위를 위해 종전까지 인정하지 않던 추가 혐의를 순순히 인정한 것이 정 사장 기소유예 처분의 밑거름이 됐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일부 임원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수사과정에서 ‘정 회장이 원하는 만큼의 충성심을 보이지 못한’ 인사들에 대한 질책이 정 사장을 통해 전달됐다는 후문이다. 일부 임원에 대해선 ‘면회도 오지 마라’는 뜻을 전했다는 이야기마저 나돌 정도다.
검찰의 최종 처분은 정 회장 추가 기소, 정 사장 기소유예 그리고 현대차 핵심 임원 모두 불구속 기소로 마무리됐다. 검찰청사 주변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현대차 법무팀이 막판에 ‘다른 임원들은 검찰 처분대로 하고 정 사장만 풀어 달라’는 식으로 접근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결국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과 현대차 법무팀 그리고 정 회장의 눈치를 봐야했던 일부 임원들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정 사장이 극적으로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현대차 측에선 정몽구-정의선 승계과정상의 문제가 공론화된 후 정 회장이 결국 모든 것을 끌어안고 구속되면서 ‘후계에 대한 잡음은 어느 정도 일단락됐다’고 자체 판단하는 분위기다. 현대차 사정에 밝은 한 업계 인사는 “현대차 법무팀과 대관업무 라인 업무의 무게중심이 정몽구 회장에서 정의선 사장으로 옮겨간다고 보는 시각도 제법 있다”고 최근 기류를 전한다.
▲ 지난해 3월 13일 기아자동차 미국공장조인식을 치르는 정의선 기아차 사장(왼쪽 두 번째)을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 ||
정 회장 병보석 문제에 대해 검찰은 공식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내부 분위기는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가 ‘재벌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는 자제해달라’는 눈치를 사법당국 측에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정 회장이 병보석으로 나올 경우 정 사장 후계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정리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 사장이 전면에 나서더라도 여전히 정 회장이 경영 전반을 주관할 것이란 관측이 대세다. 그러나 정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정 사장의 대외 입지를 높여주는 방안이나 정 사장 후계체제 가속화를 위한 조직 개편 가능성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주요 계열사 지분 승계 작업이나 정 회장 구속 사태 이후 불거진 내부 갈등설 등을 극복해야 한다.
정 사장이 검찰수사의 족쇄를 벗어던졌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기소유예 처분 받고 나서 곧바로 대외 보폭을 늘리는 것은 오히려 가까스로 가라앉힌 비판적 여론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격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차가 공식후원사인 독일 월드컵 현장에 아버지 대신 날아가 진두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해진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