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의 소환설은 비자금 문제로 구속된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고려한 듯하다. | ||
최근 삼성그룹을 지켜보는 재계 인사들의 이구동성이다. 격랑을 겪으면서도 줄곧 ‘총수일가 무소환 신화’를 지켜온 삼성그룹 입장에선 가능성 높게 거론되는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대한 검찰 소환설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검찰 쪽에선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사건과 관련해 삼성 전·현직 수뇌부 인사들의 소환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여러 갈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자연스레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대한 소환 현실화 여부는 정·관·재계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검찰 소환이 확정됐다’는 이야기가 검찰청사 안팎에서 나돌고 있다. 검찰은 삼성 총수일가 소환 여부에 대한 공식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미 내부에선 확정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소환 소문은 지난 4월 말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4월 27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형평성 논란’이 불거져 결국 검찰과 정치권,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 사이에 이 회장 소환 가능성 언급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정몽구 회장 구속 이후 불거진 이 회장 소환 논란은 ‘형평성 논란’이 빚어낸 산물이라 보는 시각도 많았다. 당시 삼성그룹 관계자는 “검찰과 언론 사이에서 가능성이 거론될 뿐이지 (이 회장 소환이) 현실화될 여지는 없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검찰수사의 칼끝이 이 회장 턱밑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재용 상무의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한 지분 대량 확보를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헐값에 배정된 것은 이미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최근 열린 에버랜드 사건 관련 삼성 측 전현직 임원에 대한 공판에서 ‘이재용 상무의 전환사채 인수 과정이 그룹 차원에서 기획됐다는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혀 삼성을 긴장케 했다.
이 회장 측근인사에 대한 검찰조사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지난 1996년 전환사채 발행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이었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에 대해 검찰은 지난 5·31 지방선거 전부터 소환을 추진해왔다. 선거 이후 지병으로 입원 중인 현 전 회장은 퇴원 이후 검찰조사에 응할 것으로 알려진다.
한때 이건희 회장 최측근이었던 현 전 회장이 한나라당 후보로 제주지사직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일각엔 이건희-현명관 두 사람에 관한 묘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검찰조사를 받는 시점에 여권행이 유력하게 점쳐지던 현 전 회장이 야당행을 택한 것은 정부·여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란 내용이었다. 즉, 현 전 회장의 한나라당행은 결국 이건희 회장을 당혹케 하는 사건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런 현 전 회장의 검찰소환 조사 임박은 이 회장과 삼성그룹 수뇌부로 하여금 ‘현 전 회장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근심하게 만든다는 관측이 뒤를 따랐다.
검찰은 거물급 인사를 소환 조사하기 직전 그의 핵심측근들을 먼저 소환해 주요 진술을 확보한 뒤 해당인사를 소환하는 절차를 밟아왔다. SK글로벌 사태 당시 최태원 회장의 경우나 최근의 정몽구 회장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총수들은 모두 구속수감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러한 전례 때문인지 최근 삼성그룹의 대외 업무 담당부서를 비롯한 주요부서가 정·관계 인사 접촉을 늘리고 홍보 선전을 강화하는 등 비상체제에 돌입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검찰 내부에서 삼성 관련 수사 마무리 시점을 8월 말로 잡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이 적절한 소환 시점인 셈이다. 최근 검찰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일부 기자들에게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대한 공개 소환 검토’ 가능성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의 공세에도 이 회장 일가에 대한 구체적 소환계획에 대한 공식언급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검찰청사 안팎에선 이 회장에 대한 ‘비공개 소환설’이 나돌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일각에선 이 회장 비공개 소환 일정과 절차가 ‘구체적으로 확정됐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온다.
‘비공개 소환’은 사법당국이 해당 인사 공개 소환에 대한 부담을 가질 경우에 택하는 기법이다. 만약 이 회장을 공개적으로 소환했다가 ‘혐의가 없다’는 결과가 나올 경우를 상정해볼 수도 있다. 혹은 공개 소환으로 달궈진 여론의 기대치에 부담을 느껴 이 회장 혐의 입증을 위해 검찰의 수사가 장기화될 우려도 있다. 연말이나 내년 초까지 수사가 이어질 경우 각 정파의 대선후보 경선일정과 겹쳐 예상치 못한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검찰이 공개 소환을 통해 얻을 부담감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공개 소환설이 힘을 얻는다. 공개 소환을 막기 위한 삼성의 초호화 법무진이 펼친 전방위적 로비 결과가 비공개 소환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거물급 인사에 대한 비공개 소환의 경우 서울 시내 호텔 방이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제5공화국>에 ‘권정달 전 의원이 호텔 방에서 검찰이 준비해 온 녹음기에 대고 진술하는 장면’이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각에선 ‘비공개 소환 직전 서면 질의를 통해 이 회장으로부터 필요한 진술을 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비공개 소환을 통해 소환당하는 자나 소환을 집행하는 자가 모두 부담을 최소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재용 상무에 대해서도 그동안 소환 조사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그러나 검찰 소식에 밝은 인사들 사이에서 그 가능성은 낮게 평가되고 있다. 전환사채 발행과 관련해 이 상무는 수혜자일 뿐 집행자는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구속 수사 가능성이 나돌던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설령 공개 소환에서 비공개 소환으로 조사방식이 전환된다 해도 ‘총수일가 무소환 신화’를 이어온 삼성 인사들 입장에선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삼성 주변에선 ‘이 회장이 다시 해외출장을 떠날 것’이란 미확인 소문마저 등장한 상태다.
만약 검찰이 이 회장에 대한 비공개 소환 조사를 단행한 뒤 결과를 사후에 발표할 경우 이에 대한 여론의 질타도 예상 가능한 대목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이미 소환 방침은 굳어진 것으로 안다. 수사당국이 ‘공개’와 ‘비공개’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관건”이라 밝히기도 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