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맹희 전 회장이 이건희 회장(사진)을 상대로 낸 주식인도청구소송 4차 공판에서 치열한 법리 공방이 벌어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삼성특검 수사기록이 ‘키’인데…
이맹희 전 회장 측은 그동안 2008년 당시의 삼성특검 수사 기록 공개를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이 전 회장 측은 소송을 제기하며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각종 금융자산에 관한 계좌추적 자료 및 차명재산 관리 및 처분 내용과 함께 이건희 회장이 취득하고 처분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주식에 대한 예탁관리 현황과 명의개서 신청자료, 이익배당금의 지급시기와 내역 자료 등의 증거조사를 신청한 바 있다.
지난 2008년 당시 삼성특검은 “이건희 회장이 차명으로 보유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주식이 비자금이 아닌 선대회장의 유산”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차명재산의 내역 등 구체적인 수사기록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등의 차명주식에 관한 상속권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양측은 구체적인 특검 수사기록이 공개될 경우 그 내용에 따라 이번 소송에서의 입지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특검 수사기록 공개와 관련해 양측의 신경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결국 지난 3차 공판에서 재판부가 이맹희 전 회장 측의 특검자료 공개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2008년 이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특검 수사기록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삼성특검 기록은 비단 삼성가 내의 재산 소송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재벌개혁의 분위기가 삼엄한 요즘 뒤늦게 공개되는 삼성특검 기록이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양측 변호인은 지난 13일 검찰에서 특검자료를 함께 열람하고 차명주식 관련 계좌추적 자료 및 주식 현황 자료 공개에 합의한 상태. 하지만 양측이 합의한 자료 중 법원에 어느 범위까지 보내야 할지가 공판 전날(28일)에야 검찰에서 확정되었다고 한다. 결국 특검자료 공개는 오는 9월 26일 5차 공판으로 미뤄진 상황.
공판 과정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 측이 변론기일 연기를 요청했었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이 전 회장 측은 보다 확실한 변론을 위해 특검자료가 공개된 이후로 연기를 원했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설명하던 도중 양측 변호인 사이에서 언쟁이 오갔다.
이 전 회장 측은 먼저 “지난 8월 13일 특검기록을 열람하는 자리에서 피고(이건희 회장) 측 변호인단이 기일 연기에 합의해놓고 나중에 다시 번복했다”며 “자신들은 변론 준비를 다해놓고 갑자기 기일 연기를 거부하는 행동은 안했으면 한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이건희 회장 측에서는 “합의한 사실도 없고 법정 외에서 소송 대리인 간에 오간 일을 공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면서 “재판부가 연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따라야 한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이맹희 전 회장 측이 낸 ‘변론기일 변경 신청서’를 공개하며 “원고가 변론기일 변경을 신청했으나 피고 측이 동의하지 않았다. 쌍방의 동의 없다면 원래 정한 날짜에 공판을 하는 것이 기본적 입장”이라고 정리했다.
# 새로 등장 ‘대상재산’은 또 뭐지?
▲ 이맹희 전 회장. |
이맹희 전 회장 측은 “그동안 피고(이건희 회장)가 관리해온 차명주식은 매각과 재매입 과정을 거치며 계속해서 차명으로 보유해왔다”면서 “이는 모두 상속재산의 변형으로 대상재산에 해당되기 때문에 공동상속인 모두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같은 상황을 두고 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차명 주식의 명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현재 이 회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이 반드시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주식으로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회장 측 변호인은 “주식을 여러 차례 매도하고 매수해온 과정에서 명의가 수없이 바뀌었고 이건희 회장의 개인 자금이 들어갔기 때문에 어느 주식이 상속받은 차명주식인지 일일이 파악하기가 어렵다”며 대상재산으로 볼 수 없음을 주장했다. 양측 사이에선 대상재산의 법리적 해석을 두고도 여러 차례 이견이 오갔다. 대상재산에 대한 공방은 삼성특검자료가 공개되는 다음 공판에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날 서창원 부장판사는 재판을 마무리하며 “다음 공판에서는 특검기록이 공개되는 만큼 대상재산에 대한 법리적인 변론에 집중해 달라”고 주문했다.
# <삼성을 생각한다>는 이맹희 편?
이날 공판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 하나. 차명주식의 실질 주주가 이건희 회장이 아닌 이맹희 전 회장을 포함한 공동상속인들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이맹희 전 회장 측에서 근거 자료로 인용한 것이 바로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변호사)이 쓴 <삼성을 생각한다>였다. 이 전 회장 측은 스크린을 통해 책 표지와 내용 등을 보여주면서 삼성이 차명재산 관리를 매우 은밀하게 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등장한다.
‘삼성 본관 27층 전략지원팀 내 경영지원팀(옛 재무팀 내 관제팀) 구석에 상무 방이 있다. 상무 방에는 가구가 있는데 그 뒤 벽에 비밀 문이 있다. 이 문을 열면 철창이 나오고 그 안에 비밀금고가 있다. 안에는 각종 유가증권·의류권·상품권·순금이 있다. 이곳에는 경영지원팀 가운데 극소수만 접근할 수 있다…. 금고에 보관하는 돈은 비자금 중 극히 일부분이다. 비자금은 전략지원팀에서 차명으로 관리하는데 전·현직 핵심 임원 1000여 명의 차명계좌에 현금·주식·유가증권 따위로 분산되어 있다.’
이건희 회장 측에서는 차명주식을 공동상속한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권리를 가지고 단독으로 소유해 왔으며 이 같은 이 회장의 권리는 그룹 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해 이맹희 전 회장이 차명 주식을 포함한 차명 재산 관리는 재무팀 내 관제팀의 극소수 인원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반박 자료로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세운 것.
하지만 재판부는 “책 내용에 이번 사건과 관련된 차명 주식 내용이 직접적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지적해 인용 자료로서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과거 삼성특검 수사 당시의 언론 보도를 자료로 인용했다. 이 회장 측 변호인은 2008년 3월 24일자 방송뉴스 등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며 “원고는 자신이 ‘컴맹’이라 2008년 특검 수사발표를 보지 못해 차명주식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지만 당시 신문과 방송을 통해 줄기차게 보도됐다. 당시에 이건희 회장의 차명주식 보유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번 공판은 지루한 법리적 해석에 대한 공방을 이어가며 뚜렷한 결과물을 내지 못한 채 마무리된 셈이다. 삼성가의 소송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봐온 한 변호사는 “다음 5차 공판에서 특검자료가 공개될 경우 소송의 주도권이 한 쪽으로 기울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