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 회장. | ||
법정관리 중인 건설사를 인수해 김 전 회장의 비자금 50조 원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다며 조경업체 대표 등에게 투자를 권유한 뒤 돈을 뜯어낸 일당에 김 씨가 포함된 것으로 드러난 것.
전직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인 K 씨 등 무려 9명과 공모한 김 씨는 미리 일당들이 위조한 50조 원 규모의 해외 은행 예치금 및 잔고 증명서, 공증서로 투자자를 모은 뒤 사기극을 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작 김 씨 본인은 “실제 사촌형인 김 전 회장의 해외 비자금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며 사기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지만 거액 편취 목적을 갖고 K 씨와 ‘일’을 도모했다는 의혹을 비켜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김 씨 등의 범행이 꼬리를 잡힌 것은 지난 5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거물급 경제인의 은닉비자금을 여러 명이 국내로 들여오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액수가 자그마치 50조 원이라는 첩보였다.
대통령 지인 및 친인척 사칭 사건 등 거물급 사칭 대형 사기 사건을 숱하게 다뤄본 특수수사과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첩보의 신빙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봤다. 수사 경험상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그냥 묻어두기에는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돈의 출처로 알려진 곳이 다른 사람도 아닌 김우중 전 회장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더구나 비자금을 들여온다는 주체도 김 전 회장의 사촌동생 김 씨라는 것. 실제 신원을 확인해보니 김 씨는 김 전 회장 작은 아버지의 아들로 사촌형제지간이 맞았다.
경찰은 ‘혹시 정말 뭔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으로 조심스럽게 내사에 들어갔다. 새로운 비자금이 발견되면 더할 나위 없는 큰 성과, 만약 비자금의 실체가 없는 사기 사건으로 가닥이 잡히더라도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의 첫 수사망은 국내 유명 조경업체인 S 개발이었다. 첩보에 S 개발의 윤 아무개 대표가 김 씨와 동업 중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 그러나 윤 대표는 되레 김 씨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수사 결과, 김 씨와 K 씨 등의 범행은 낱낱이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 등은 법정관리 중인 H 건설사를 인수한 뒤 해외투자 방식으로 500억 달러(약 50조 원) 중 15억 달러를 들여올 계획이라면서 윤 대표에게 접근했다.
특히 K 씨는 미 연방은행으로부터 잔고증명 확인을 받은 것처럼 이메일을 조작, 윤 대표를 안심시켰던 것으로 경찰은 전했다.
이들의 말만 믿고 H 건설과 회사 인수 계약을 체결했던 윤 대표는 결국 인수 기한 안에 김 씨 등이 자금을 주지 않아 오히려 자신이 위약금으로 6억 5000만 원을 H 건설 측에 배상하는 등 총 7억 7900만 원의 금전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 씨 등 공모자 네 명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세 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잠적한 K 씨는 긴급 수배하고 출국금지시킨 상태다.
경찰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의 사촌동생인 김 씨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사촌형의 도움으로 대우그룹 산하 방위산업체에 특수강을 납품하던 업체를 운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대우가 파산한 뒤 그 역시도 곤란을 겪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결국 외자유치컨설팅업체를 설립, 사업에 나섰으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부인과도 이혼하고 두 딸과 떨어져 홀로 지하방에서 거주하는 등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경찰은 밝혔다.
그러던 김 씨가 K 씨를 만난 것은 지난해 4월경. 김 씨는 벨기에 인터폴로부터 적색수배자로 분류된 러시아인 B 씨에게 위조된 500억 달러의 자금 운용의 전권 위임을 받았다며 K 씨에게 사업을 제의한다.
K 씨와 손을 잡은 김 씨는 그 해 10월 S 개발의 윤 대표가 창원지방법원에서 관리 중인 H 건설 인수 작업 중에 있으나 자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청와대 K 정책실장과 L 전 도지사와 친분이 두텁고 사촌형인 김 전 회장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한다”며 윤 대표에게 접근, H 건설에 대한 공동 인수 계약을 구두로 체결했다. 무엇보다 김 전 회장의 사촌동생이라는 배경은 여전히 든든한 ‘보증’으로 작용했다.
2개월 뒤 김 씨는 S 개발 서울 사무실에서 싱가포르 C 은행에 예치된 500억 달러 중 1000만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는데 필요한 수수료 명목으로 윤 대표로부터 3000만 원을 받았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은 김 씨의 추가 혐의에 대해 보강 수사를 벌이고 있다. 김 씨는 줄곧 “실제 사촌형의 비자금이 있는 줄 알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지난 2004년 10월 경기도 파주 ‘금강산랜드’의 인수 대금 500억 원을 외자로 투자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업자로부터 3000만 원을 받는 등 추가 혐의가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
더구나 경찰이 김 씨의 자택에서 동두천 영상문화사업단지 조성 사업과 관련한 투자 유치 서류 30여 건을 확보, 김 씨의 행각은 단순히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