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광’ ‘전두혁’ ‘그 사람’…실화와 실존 인물 다뤘지만 ‘창작의 영역’ 강조하려는 의도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에서 고 전두환 씨를 극화한 캐릭터들의 이름이다. 역사나 실화를 그린 영화들이 실존 인물의 실명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유독 전두환 씨만큼은 한 번도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안쓰나, 못쓰나.
전두환 씨의 존재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11월 22일 개봉하는 영화 ‘서울의 봄’ 영향이다. 1979년 일어난 신군부에 의한 12·12 군사반란을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 영화다. 9시간 동안 일어난 일촉즉발의 군사 반란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 호평받고 있다. 영화 주인공의 이름은 전두광. 신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극화한 인물이다. 배우 황정민이 전두광 역을 맡아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을 그린다. 그에 맞서 군인으로서의 신념을 지키는 수도방위사령관 이태신 역은 배우 정우성이 맡았다.
‘서울의 봄’은 개봉을 열흘 앞두고 전체 예매율 1위에 오르면서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다. 관심은 1월 9일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작품이 처음 공개된 직후 증폭됐다. 역사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상처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 배우들의 열연은 물론 상업영화로서의 재미까지 두루 갖춰 오랜만에 ‘한국영화의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황정민이 분장에만 4시간 쏟은 ‘민머리’ 스타일
‘서울의 봄’이 개봉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오른 데는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에 대한 궁금증’에서 촉발한다. 그동안 전두환을 극화한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여러 차례 제작됐지만 전두환을 중심에 두고 그가 어떻게 권력을 차지하고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 그 결정적인 순간을 파고든 작품은 ‘서울의 봄’이 처음이다.
사실 12·12 군사반란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들이 있고, 전두환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아있는 실화’의 장본인이었다. 때문에 영화 제작진은 물론 황정민 역시 그 역할을 맡기가 부담스러웠을 수 있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감독의 손을 잡았다.
김성수 감독은 황정민에게 ‘영화와 인물을 창작해 바꿀 테니 목소리를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더 어려운 부탁을 건넸다. 바로 헤어스타일의 분장이다. 이와 관련해 감독은 “황정민 배우에게 ‘이 영화는 당신이 맡은 역할로 출발해서 그 사람 때문에 모두 벌어지기 때문에 대머리를 해서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에 황정민은 1초 만에 “좋다”고 답했다.
황정민은 매번 촬영마다 분장에만 4시간 30분씩 쏟아 부었다. 실존 인물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개봉 전 공개한 스틸과 예고편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소름 돋게’ 하는 민머리 헤어스타일은 그렇게 탄생했다.
#전두광이라는 가상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
전두환 씨를 극화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는 ‘서울의 봄’ 이전에도 있었다. 가장 최근작은 2020년 우민호 감독이 연출하고 이병헌과 이성민이 주연한 ‘남산의 부장들’이다. 10·26 사태를 다룬 영화에서 전두환 씨는 ‘전두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배우 서현우가 연기한 전두혁은 영화 말미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통령이 암살돼 세상이 발칵 뒤집힌 그 순간, 대통령 집무실에 몰래 숨어들어 금고를 열고 현금 뭉치와 금괴를 훔쳐 나오는 인물, 다름 아닌 전두혁이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26년’에서도 전두환 씨는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이었지만, 영화에서 이름 대신 ‘그 사람’이란 호칭으로 나온다. 불필요한 오해와 정치적인 논란 등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한 제작진의 선택이었다. 사실 ‘26년’은 제작 과정에서 여러 외압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 영화가 상상력을 발휘한 창작의 영역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26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국민에 총구를 겨눈 전두환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모여 ‘그 사람’을 암살하는 이야기다. 살아있는 권력자를 암살하려는 이야기, 실존 인물들을 빗댄 인물들이 등장하는 탓에 투자 단계에서 외압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실제로도 투자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무색하게 개봉 이후 29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의 봄’의 선택도 앞선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한다. 굳이 실명을 사용해 불필요한 해석과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선택이다. 실화와 실존 인물을 다뤘지만 영화적인 상상이 가미된 작품인 만큼 ‘창작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김성수 감독 역시 “역사만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며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순간의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욕망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름을 조금씩 바꾸고 하니까 이야기를 만들기가 자유로웠다”고 밝혔다. 역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창작의 자유를 택했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전두환 실명으로 등장한 유일한 작품은?
그렇다고 전두환이란 이름이 작품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딱 한 번, 실명 그대로 등장한 작품이 있다. MBC가 2005년 방송한 드라마 ‘제5공화국’이다. 41부작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10·26 사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제6공화국 성립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은 전두환이다. 제작진은 배우 이덕화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역할 이름으로 전두환 실명을 그대로 썼다. 유일한 선택이다. 이에 힘입어 이덕화는 대담한 도전정신도 발휘했다. 데뷔하고부터 줄곧 가발을 써왔던 그는 전두환 역할을 소화할 땐 처음으로 가발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섰다. 하지만 실명 사용으로 인한 후폭풍은 따랐다. ‘제5공화국’ 제작진은 법률 자문을 받고 극본을 집필했지만 극 중 실존인물들 가운데 일부가 제작진에게 반론을 요청하거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두환 씨를 빗댄 작품들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전두환 씨 본인이나 그 가족이 영화들을 상대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를 한 적은 아직 없다. 이번 ‘서울의 봄’ 역시 제작 과정은 물론 개봉을 앞둔 지금도 혹시 모를 변수를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물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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