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1조 5000억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소환되는 최태원 SK(주) 회장. 당시 최 회장의 사재 출연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 ||
많은 재계 인사들은 재벌가의 사재 출연 선언을 지켜보면서 3년 전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사태를 떠올리고 있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로 인해 구속수감 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때 SK그룹은 ‘1000억 원에 해당하는 최 회장 사재 출연 약속’을 채권단과의 양해각서에 명시했다.
그런데 최 회장은 당시 약속한 사재 출연을 아직까지 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그때 최 회장이 집행유예로 감형 받은 주된 배경 중 하나로 ‘1000억 원 사재 출연 약속’이 꼽혔다. 그러나 SK그룹이 SK네트웍스 경영 정상화를 위해 무상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던 사재들은 아직 온전히 최 회장 품에 있다.
지난 2005년 6월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 간 부당 내부거래 및 1조 90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업무상배임)’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최 회장은 2003년 6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돼 구치소에 들어갔었다. 2년 만에 실형의 굴레에서 벗어난 셈이다. 2003년 9월 보석으로 풀려나 실제 수감 생활은 3개월뿐이었지만 보석 상태에선 언제든 다시 구속될 수 있다는 점이 늘 족쇄였다. 최 회장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로 어깨를 펴고 경영일선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감형 사유에 대해 “사재출연, 재산의 담보제공 등 책임을 다하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노력한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등장한 ‘사재출연’과 ‘재산의 담보제공’이란 최 회장이 SK네트웍스 경영 정상화를 위해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SK 계열사 지분을 뜻하는 것이다. 지난 2003년 8월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한 워커힐 지분 40.69%(325만주)와 벤처기업 3곳의 지분 등 비상장 주식일부를 무상 기부 형태로 SK네트웍스에 출연한다고 채권단과 합의했다. ‘무조건 SK네트웍스 정상화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가치는 1000억 원이 될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얼마 후 최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나오게 된다.
그런데 ‘무상 기부’의 중심에 있던 워커힐 지분은 아직 최 회장 소유로 돼 있다. 채권단 관리 하에 있는 SK네트웍스가 경영실적이 좋아지면서 워크아웃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지금껏 최 회장이 약속했던 그의 워커힐 지분이 SK네트웍스 경영 정상화를 위해 투입된 흔적은 없다.
이에 대해 SK그룹 관계자는 “워커힐 지분 처분을 선언하자 이곳저곳에서 인수를 원했지만 적정가를 제시한 곳이 없었다”며 “헐값에 매각할 수는 없었다”고 밝힌다. 제값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이는 채권단과 합의된 것이다. 채권단과의 합의 없이 워커힐 지분은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즉,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란 설명이다.
▲ 워커힐 호텔 전경. 최태원 회장은 약속한 지분을 아직 보유하고 있고, 동생 최재원 SK E&S 부회장은 워커힐 지분 1.15%를 매입했다. | ||
그러나 지난해 말에 일어난 최대주주 지분 변동사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05년 12월 최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은 자신의 워커힐 지분 2.23%를 전량 처분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최태원 회장 친동생인 최재원 SK E&S 부회장은 워커힐 지분 1.15%를 매입해 대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최재원 부회장이 지분 매입을 위해 투자한 돈은 37억 원이다.
재계에선 조만간 최창원 부사장이 자신의 친형인 최신원 SKC 회장과 더불어 최태원-재원 형제의 SK그룹으로부터 ‘분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최태원-재원 형제가 한지붕 아래 둥지를 튼 것과도 관련있다. 얼마 전 최재원 부회장의 SK E&S가 여의도 63빌딩 생활을 청산하고 서린동 SK사옥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발맞춰 SK(주)와 SK E&S의 홍보라인도 강화돼 이들 형제 중심의 SK그룹 경영에 대한 홍보전략 강화를 예측케 하고 있다. 이같은 행보는 사촌형제와의 분가에 대한 수순 밟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최태원 회장 형제는 워커힐 지분 소유권에 집착하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내보낼 식구’가 될 최창원 부사장의 지분을 정리하면서 최 회장 친동생인 최 부회장의 이름을 워커힐 최대주주 명부에 올린 것을 ‘분가에 대비한 지분정리 작업’으로 보는 시선도 있는 것이다.
SK네트웍스 정상화 자금으로 쓰일 것으로 거론됐던 최 회장 소유의 벤처기업 지분의 변동사항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통신 관련 장비 업체들인 더컨텐츠컴퍼니와 이노에이스, 와이더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중 더컨텐츠컴퍼니는 2004년 8월 청산종결됐다. 자본금 43억 원 규모였던 이 회사의 지분이 SK네트웍스 경영정상화 자금으로 쓰이지 않은 채 그냥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SK그룹 관계자는 “일부러 청산한 것은 아니다. 그 회사가 경영난에 처해 자본잠식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은 것”이라고 밝혔다.
자본금 32억 원 규모인 이노에이스의 최대주주는 최태원 회장(43.08%)이며 SK텔레콤(14.25%)과 와이더댄(7.50%)이 대주주 명부에 올라있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사태 직후인 2003년 12월 현재 최 회장의 이노에이스 지분율은 37.5%였다. SK네트웍스 경영정상화 자금에 투입되기는커녕 지분이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와이더댄의 경우 최 회장 지분율은 현재 4.18%다. 지난 2003년 당시 최 회장 지분율은 49%(560만 주)였다. 그런데 2004년 말 해외투자자들에게 460만 주를 주당 6달러에 매각해 270억 원을 획득했다. 흥미로운 점은 와이더댄 지분 매각 직후 최 회장이 SK(주) 지분 37만 6358주(0.29%)를 취득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듬해 다시 한번 일어난다. 지난 2005년 말 최 회장은 와이더댄 주식 17만 주를 주당 12달러에 매각해 20억 원 자금을 확보한다. 얼마 후 최 회장은 SK(주) 지분 3만 3900주(0.02%)를 추가 매입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최 회장이 그룹 지배력 강화 차원에서 SK(주) 지분 추가 매입을 위해 와이더댄 지분 매각대금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 또한 SK네트웍스 경영 정상화 자금과는 무관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SK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된 것에 대해 “워커힐과 벤처 지분에 대한 출연 약속이 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최 회장이) 일부 계열사 지분 매각과 현금 출연을 통해 SK네트웍스 정상화 자금을 조달하고 그밖에 여러 사회복지 노력을 했던 것이 반영된 것”이라 덧붙였다. 워커힐 지분에 대한 매각작업이 아직 진행 중이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