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국감 기간 신병치료차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도피성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5일 재경부 감사장의 비어 있는 이 회장 증인석. | ||
공식적인 명분은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밴 플리트 상 수상자로 선정돼 9월 19일 미국 현지 시상식에 참석한다’는 것. 이 상은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한국에 대한 이해증진과 한·미 이해관계 개선을 위해 활동한 인사들에게 매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장의 출국일정을 바라보는 각계의 시선은 ‘뭔가 다른 출국배경이 있을 것’이란 의견으로 모아지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 회장이 소환대상으로 끊임없이 거론돼 왔기 때문이다. ‘도피성 미국행’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이 회장은 국정감사를 앞두고 몇몇 상임위의 증인출석요구가 예상되는 가운데 신병 치료 명분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도피성 미국행’이라는 빈축을 샀다. 밴 플리트 상 시상식 일정이 9월 중순이라 10월 중 개최될 국정감사를 피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과정에 개입한 의혹 때문에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얼마 전 검찰의 비공개 소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홍 전 대사 소환조사 발표 이후 검찰고위인사는 수사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언급을 했다. 이학수 부회장에 대한 소환이 비공개로 이뤄질 것이란 점, 이 회장 아들인 이재용 상무는 편법증여 당시 이에 개입할 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소환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 계획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소환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가 없을 것이란 점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법조계 인사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 해석을 내린다.
첫째는 이 회장에 대한 기소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기소를 할 작정이라면 장기외유 가능성이 있는 인사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검찰 정기인사에서 에버랜드 사건 담당 이원석 검사가 수원지검으로 발령받았다. 삼성 입장에선 오랜 기간 동안 삼성 사건을 담당해온 검사가 다른 곳으로 가게된 것에 반색했겠지만 검찰조직이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검사는 검찰과 법조계 내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서울중앙지검에 파견근무 형태로 남아 에버랜드 사건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검사에 대한 발령을 기점으로 검찰의 삼성에 대한 칼끝이 무뎌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관측이 현실화된다면 이 회장에게 남은 장애물은 오직 가을에 열릴 국정감사밖에 없다. 국정감사만 피하면 앞으로 더 겪어야 할 큰 시련은 없는 셈이다. 이런 분석을 하는 인사들은 “이학수 부회장에 대한 비공개 소환을 끝으로 사실상 삼성 핵심인사에 대한 직접 조사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이 회장에 대한 조사 없이 에버랜드 사건을 서둘러 종결할 경우 검찰과 법조계가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구속수감됐을 때 불거진 형평성 논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산 총수형제들이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것을 두고 ‘솜방망이 판결’ 논란이 불거졌던 것만 봐도 여론의 향배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이 회장에 대한 출국금지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전제 하에서 ‘에버랜드 수사가 장기화될 것’이란 관측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길어질 수사라면 해외망명 가능성이 없는 이 회장의 단기 해외일정에 검찰이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시각이다.
▲ 이건희 회장의 전용기. | ||
재판 과정이 장기화될 경우 이 회장에 대한 논란은 가을로 예정된 국정감사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이 ‘국정감사 모면용으로 미국행을 택했다’는 지난해의 비난여론을 다시 감수하면서도 장기 외유를 택할 가능성을 높게 만들어주는 대목이다.
국정감사 이후에 벌어질 정치적 상황 또한 이 회장의 장기외유 가능성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몇몇 정치권 인사들은 “국정감사 이후 각 정파 내에서 내년 대선을 겨냥한 본격적인 계파 간 신경전과 합종연횡이 벌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만약 이 회장이 장기외유를 택해 국정감사라는 ‘소나기’를 피하게 되면 이후 요동치는 정국 상황으로 인해 삼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잠잠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회장 측은 출국시점을 언제로 잡을까. 재계와 정치권 그리고 검찰·법조계 등에서 예상하는 출국시기는 8월 24일 에버랜드 항소심 공판 직후다. 기왕 ‘도피성 외유’를 할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좋겠지만 8월 24일 열리는 공판 직전에 이 회장이 출국하게 된다면 이 회장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을 것이 자명하다. 검찰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될 수도 있다.
이 회장에 대한 소환 여부나 구체적인 시기·방법 등에 대해 검찰은 “결정된 바가 없다”고만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재계인사들 사이에선 ‘삼성 측이 이 회장 소환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차선책으로 호텔 같은 제3의 장소에서 조사받는 방안에 배수의 진을 치고 전방위적 로비를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같은 비공개 소환이라도 검찰청사에 직접 찾아가 조사를 받은 홍석현 전 주미대사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게 해야 한다는 충성심인 셈이다.
한편 이건희 회장 출국 여부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