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한 장면과 교도소 내부 모습 합성.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
지난 2007년 1월, 30대 남성이 사기죄로 전남 장흥교도소에 수감됐다. 이미 동종 전과를 보유하고 있던 박 아무개 씨(36)가 또 다시 사기죄로 붙들린 것이다.
교도소에서 박 씨는 평소 남다른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노역이 끝난 뒤 쉬는 시간이 되면 늘 책을 손에 들었던 것. 다들 휴식을 취할 때 박 씨만 증권전문서적과 경제지를 들고 자리를 지켰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박 씨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후 박 씨는 일간지를 통해 증권 모의투자에 참여하며 주식 고수 행세를 시작했다. 차츰 재소자와 교도관 사이에서 박 씨가 투자고수라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형 미끼를 던졌다. 자신이 대기업 친인척이라며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여기에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기업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어 투자 성공률이 매우 좋다는 거짓말도 보태 본격적인 사기극을 펼쳐나갔다.
누가 들어도 사기전과 6범의 황당무계한 헛소리였지만 교도관 A 씨(49)만은 박 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정 씨는 이미 증권투자로 수천만 원을 날린 상태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A 씨는 “유망주식에 투자해 고수익을 보장한다. 돈만 맡기면 크게 불려주겠다”는 박 씨의 말에 속아 수차례 돈을 건넸다.
이렇게 시작된 박 씨의 사기극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다. 날이 갈수록 원하는 금액도 커졌다. 처음엔 한 번에 수백만 원씩 돈을 건네받았지만 차츰 온갖 핑계를 대며 수천만 원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A 씨는 2007년 5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총 41차례에 걸쳐 5억 원이 넘는 돈을 박 씨에게 송금했다.
하지만 박 씨는 고수는커녕 단 한 번도 주식거래를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A 씨에게 받은 돈은 가족들에게 송금해 생활비로 모두 사용했다. 심지어 교도소에 머물고 있을 땐 1000만 원 상당을 다른 교도관에게 뇌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외부농장 노역 근무를 감독하던 B 씨(45)에게 수시로 돈을 건네 다른 재소자들은 꿈꿀 수도 없는 호사를 누렸던 것이다.
박 씨는 농장 노역을 나갈 때마다 B 씨에게 용돈 명목으로 50만~200만 원을 지급했는데 그때마다 특별한 답례가 돌아왔다. 보통 재소자들의 점심식사를 농장에서 만든다는 것을 이용해 B 씨는 몰래 육류를 반입해 박 씨가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박 씨는 원할 때마다 담배를 지급받았고 B 씨의 PMP로 최신영화까지 관람하는 문화생활도 즐겼다.
목돈이 오갈 때마다 박 씨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더욱 늘어갔다. 공중전화를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때로는 B 씨의 휴대전화를 통해 마음껏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급기야 착용이 금지된 지퍼가 있는 점퍼까지 교도소 내에서 입고 다녀 재소자들 사이에서는 박 씨가 ‘범털(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수감자를 가리키는 은어)’로 불리기까지 했다.
한편 자신의 돈이 동료 교도관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A 씨는 여전히 박 씨를 굳게 믿고 있었다. 박 씨는 의심을 사지 않게 배당금 명목으로 틈틈이 돈을 지불하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교도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꿈에도 몰랐던 박 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지시대로 영문도 모른 채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을 받고 다시 송금하는 일을 반복했다. 가끔 A 씨가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냐”고 물어오면 아무런 수익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잘 돼 돈이 불어나고 있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박 씨의 행동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던 A 씨는 급기야 배당금 명목으로 받은 돈마저 다시 투자금으로 건넸고 돈이 궁해지자 대출까지 손을 댔다. 그것도 한계에 부딪치자 친척들의 돈까지 끌어들여 모조리 박 씨에게 전달했다. 시간이 흘러 2009년 박 씨가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자 A 씨는 더욱 애가 탔다. 그럴수록 박 씨는 더욱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 출소를 앞두고 “내가 걸어 다니면 되겠느냐”며 은근히 자동차를 요구했고 결국 A 씨는 자동차(제네시스)를 구입해주기까지 했다. 여기에 활동비 명목으로 5장의 신용카드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출소 후 시간이 흘러도 수익이 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A 씨는 원금상환을 요구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사기극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A 씨는 재소자와의 돈거래를 금지하는 내부규정을 스스로 어긴 것이라 경찰 신고는 꿈꿀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5000만 원 상당의 신용카드 결제대금 영수증과 지급했던 자동차 한 대뿐이었다.
그렇게 묻힐 뻔했던 이 황당한 사기극은 교도소 내에서 담배거래가 이뤄진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조사를 하다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전남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는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편의제공 대가로 뇌물을 수수하는 등 교도소 내 불법행위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