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차 회장(오른쪽)과 김동진 부회장. | ||
지난 봄 현대차 비자금 사태가 터진 뒤 처음 단행한 인사였다. 당연히 현대차 안팎에선 인사를 통해 드러날 정 회장의 복심이 무엇일까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발표 직전까지 ‘누가 온다더라, 누가 발탁된다더라’ 하고 소문이 무성할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지난해 물러났던 MK(정몽구)사단의 1세대 가신으로 불리는 박정인 현대모비스 고문이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담당 부회장으로 컴백하는 것으로 끝났다.
사실 현대차 안팎에선 정 회장이 보석으로 풀려나 경영일선에 컴백한 이후 처음 실시하는 인사인 만큼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 휘말렸던 그룹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파격을 단행할지에 대한 관심이 컸다. 정 회장이 그동안 ‘수시인사’라는 독특한 용병술을 통해 조직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회장의 첫 인사가 ‘현상 유지’로 드러나자 현대차 안팎에선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조직 내 갈등설은 물론 ‘정 회장 볼모론’까지 나도는 등 미묘한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다.
물론 현재 현대차그룹의 지상과제는 재판이 진행 중인 비자금 사건에서 정 회장이 무사히 ‘귀환’하는 일이다. 현재 보석 상태로 경영을 챙기고 있는 정 회장이 실형이라도 선고받게 된다면 현대차그룹으로선 치명적이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 내부에선 정몽구 회장을 ‘교도소 담장 위로 걷게’ 만든 현대차 고위 임원들의 검찰 진술에 대한 책임론이 논란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검찰이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조성지시를 했다는 현대차 고위 임원들의 진술을 확보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소환 조사를 받았던 김동진 부회장, 이정대 재경본부장, 정 회장의 비서실장을 오랫동안 지낸 김승년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본부장 등 3인방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이런 논란으로 인해 현대차 일각에선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가신의 난’이 아니라 ‘환관의 난’이라는 도가 지나친 비난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가신’은 주군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환관’은 주군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눈여겨 볼 대목은 이런 논란이 정의선 사장 조기 옹립설과 정태영 사장 활용설 등이 등장하며 미묘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2세 체제의 등장은 또다른 대규모 인사를 수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현대차 안팎에선 정 회장의 박 부회장 재기용 인사가 단행되기 직전까지 위기 수습책으로 정태영 사장이나 최한영 사장 요직 컴백론 등 온갖 시나리오가 흘러다녔다.
이는 MK사단의 복잡한 내부 역학구도와 맞물리면서 더욱 증폭됐다.
최근 2~3년 동안 현대차그룹의 MK사단의 1세대 경영인들은 은퇴의 길을 밟아 왔다. 지난해 박정인 부회장의 이선 퇴진이나 그 전에 이루어진 유인균 현대제철 고문의 이선 퇴진 역시 그런 예다. 시니어급의 퇴진은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사장의 취임을 앞두고 사전 정지 작업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주니어급 MK사단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MK사단 내부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경영지원본부장을 맡아서 현대차그룹의 인사 쪽 실무를 오랫동안 챙겨왔던 이중우 사장이 지난 2002년 다이모스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 자리를 메운 사람이 김승년 부사장이다. 김 부사장은 정 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이 사장의 보직이었던 인사실장까지 맡아 최고 실세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해 구매총괄본부로 옮겼다. 물론 구매총괄본부장은 오너의 신임이 두터운 자리다.
반면 이 사장은 지난해 말 인사 때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가 MK사단에서 누렸던 위세에 비하면 급작스런 퇴진이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사장 말고도 현대차그룹은 특유의 인사관행으로 인사부침이 극심하다. 하지만 이 사장은 김승년 부사장만큼이나 정 회장을 지근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인사라는 점에서 그의 은퇴는 이런 저런 뒷말을 낳았다. 중간 임원 A씨에 대한 관리 책임론도 나왔고 이를 둘러싼 세싸움 얘기도 나왔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은 이런 내부의 미묘한 갈등 기류 확산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됐다. 은밀하게 감춰져있던 글로비스의 비자금 금고까지 검찰에 제보해주는 내부인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정 회장이 석방 뒤 첫 인사에서 흐트러진 내부군기를 바로잡으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었다. 조직 내 갈등이 결국 비자금 사태의 원인이 됐고 검찰 조사를 받은 인사들이 비자금 조성의 최종 책임자로 정 회장을 지목하는 일이 벌어졌다. ‘관행상’ 국내 재벌그룹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현대차 안팎에선 정 회장이 칼을 꺼내들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칼이나 채찍 대신 대외업무에 능한 MK사단 1세대의 대표경영자를 컴백시켰다. 또 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있는 기존 인사들은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를 두고 재판을 받고 있는 정 회장 입장에서 피고인 자격으로 법정에 서 진술하고 있는 현대차 고위 임원에 대한 인사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른바 ‘볼모론’이다.
이는 다시 현대차 내부의 ‘가신론’과 ‘환관론’ 논란을 부추기는 방아쇠 노릇을 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것이 2세 승계작업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다. 재계에선 책임론이 힘을 받을 경우 김승년 부사장을 정점으로 재정비됐던 MK사단의 주니어급의 역학구도가 또 한 번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 경우 2세 승계 시간표가 다시 쓰여질 가능성이 커진다.
휘어잡기 인사로 유명한 정 회장이 어떤 방법으로 이런 내부 갈등의 불씨를 잠재울지 주목받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