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참여연대에게 LG가 최근 무릎을 꿇었다.
참여연대는 지난 2003년 1월 LG그룹 구본무 회장을 비롯한 전·현직 이사진 8명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1999년 (주)LG 이사들(구본무 허창수 허동수 강유식 성재갑 조명재 이기준 장종현)이, (주)LG가 전량 보유하고 있던 LG석유화학 지분 일부를 헐값에 사들인 뒤 (주)LG에 다시 고가로 매각해 823억 원의 부당 이익을 취득했다는 것이 소송 내용의 골자다. 이사진의 주식 헐값매입과 고가 매각 과정에서 (주)LG가 이사진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손해를 봤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3년 반 만인 지난 8월 17일 1심 재판부는 참여연대의 판정승을 선언했다. 구본무 회장은 허창수 GS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과 함께 (주)LG에 400억 원을 배상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지난 9월 11일 LG는 항소 포기를 선언했다. 소모적 논쟁을 줄이고 경영에 매진하겠다는 까닭에서다. 아울러 구본무 허창수 허동수 회장 등이 (주)LG에 400억 원을 균등하게 나눠 지급했다고 발표했다. LG는 경영활동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뜻에서 항소 포기의 변을 밝혔지만 재벌가의 ‘공공의 적’인 참여연대도 항소를 포기 안하고 사태를 정리하겠다고 나서 재계 인사들의 궁금증이 커져만 가고 있다.
1심 재판부 판결 이후부터 ‘LG가 항소를 포기할 가능성’이 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거론돼 왔다. LG가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할 경우 벌어질 장기 법정공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권 들어 4대 재벌 중 LG만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행운’을 누리고 있다.
1심 재판결과가 나오는데 3년 반이 걸린 이 소송 건이 차기 정부 출범 이후까지 장기화될 경우 정권 초기마다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풍토상 LG가 ‘괜한’ 시선을 받을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참여연대와의 기나긴 공방이 차기 정권 초기에 LG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까닭에서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LG가 참여연대와의 접촉을 시도해 의견을 조율할 것’이란 관측도 뒤를 따랐다. 1심 판결 뒤 참여연대가 일부승소를 환영하면서도 ‘배상액이 너무 적다’며 항소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가 항소를 고집하면 LG가 항소를 포기해도 재판은 2심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9월 11일 LG가 항소 포기를 발표하자 참여연대는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항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성명을 통해 밝혔다. 이렇다보니 LG-참여연대 물밑 접촉설에 대한 재계 인사들의 입방아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대해 LG 측은 “참여연대와는 아무런 교감이 없었다”며 접촉설을 강력 부인했다.
한편 재계에선 구 회장 등 이사진이 (주)LG에 배상한 400억 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허창수 허동수 회장의 최근 지분 거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9월 20일 금감원 공시내역에 따르면 허창수 회장은 자기 명의 GS 지분 60만 4657주를 최근 매각했다. 이로써 허창수 회장의 GS 지분율은 5.41%에서 4.77%로 낮아졌다. 허동수 회장도 54만 9492주를 매각해 보유 지분이 228만 1400주(2.41%)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처분한 GS 지분의 매각 주가는 3만 1500원이다. 이를 환산하면 허창수 회장은 이번 지분 매각을 통해 190억 원을, 허동수 회장은 170억 원을 조성한 셈이다. 두 사람 다 400억 원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자기 몫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실탄을 마련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주)LG에 배상하기 위해 지분 매각을 단행했다는 공식발표는 없었다.
반면 구본무 회장이 보유한 지분 내역엔 최근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LG그룹은 구 회장이 (주)LG에 배상할 금액을 어떻게 마련했는지에 대해 공식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구본무 회장 등으로부터 (주)LG로 들어간 금액 400억 원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해 보인다. (주)LG는 최근 들어 LG화학 지분을 집중적으로 매입해왔다. ‘지주회사의 계열사에 대한 지배 안정성 강화’라는 것이 LG가 내세우는 명분이다. (주)LG는 지난 6월 13일부터 LG화학 지분을 매집하기 시작해 이전까지 30%(2192만 6000주)였던 지분율을 불과 석 달 만인 9월 8일 현재 33.3%(2433만 4230주)까지 끌어올렸다. 취득 단가는 주당 3만~4만 원 선이다. 석 달 만에 투입한 금액이 적게 잡아도 720억 원을 족히 상회하는 셈이다. 특히 지난 8월 17일 1심 판결 이후 (주)LG가 LG화학 지분에 쏟은 금액은 110억 원가량으로 추산된다. 구본무 회장 등이 (주)LG에 반환한 400억 원이 LG화학 지분 매집에 알토란처럼 쓰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주)LG의 LG화학 지분 매집에 대해 업계에선 ‘LG화학과 LG석유화학의 합병을 염두에 둔 것’이란 평이 나돌기도 했다. 비슷한 업종의 두 업체가 합병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며 합병의 경우를 대비해 (주)LG가 지배력 강화 차원에서 LG화학 지분을 매집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이러한 추측이 대해 LG 측은 합병 가능성을 줄곧 부인해왔다.
LG화학은 LG석유화학 지분 40%를 가진 최대주주다. 합병 현실화 여부를 떠나 (주)LG의 LG화학 지분 매집은 결국 (주)LG→LG화학→LG석유화학의 지배구조 연결고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구 회장은 LG석유화학 지분 거래로 인해 거액의 돈을 (주)LG에 배상하게 됐지만 그 돈이 결국 LG그룹 지배구조 강화에 쓰이게 된 셈이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자평할 수 있을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