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감 파행 지난 9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국회 기재위의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재벌총수의 증인채택 문제로 공방을 이어가며 정회에 들어갔다. 연합뉴스 |
“올해 국감은 대대적인 재벌개혁의 분위기와 대기업에 대한 성토 분위기가 예고됐다. 국감 때마다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증인 신청이 있었지만 어디 제대로 참석한 일이 있었나. 올해는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올해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민주통합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번 국감에 임하는 각오를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초선 의원으로서의 의지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지만, 이번 국감 전야 분위기는 확연히 예년과는 달랐던 게 사실이다. 여야 대선주자들이 앞 다투어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화두로 내세웠고, 의원들도 대기업 위주의 시장에 제재를 가하는 법안들을 발의했다. 상임위별로 주요 그룹 회장들을 증인으로 대거 신청해놓은 상태여서 이를 막기 위한 기업들의 사전 작업도 대단했다. 국감을 앞두고 각 기업의 국회 담당자들이 각 상임위 소속 의원들 방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9일 기자가 한 민주통합당 의원실에 들렀을 때도 대기업 직원들이 의원을 만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보좌관은 “기업 사람들이 국감 때 특히 더 찾아오는 게 사실이다. 올해엔 삼성 현대차 등 회장 소환이 예고된 기업에서 더 자주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국회의원 측은 가장 바쁜 때인 국감 시즌에 이처럼 찾아오는 기업 관계자들의 발길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고 한다. 또 다른 민주통합당 초선 의원실 관계자는 “초선이라서 그런지 우리 방은 그렇게 기업에서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라고 전했다.
기자는 정무위 소속 한 의원실을 찾은 기업 관계자를 따라가 의원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았다. 이 관계자는 “국감 때 어떤 내용이 질의될 것인지 확인 차 들른 것”이라고만 전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가 자리를 뜬 후 보좌진은 “증인 신청 목록에 회장 이름이 올라있으니 빼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재계 서열 10위권 내 그룹들은 대관담당자들을 통해 국감 사전정보 수집에 나서고 있다. 특히 기업 총수 소환이 예고됐던 기업들의 경우 ‘회장님 증인 출석’을 막기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국감을 코앞에 둔 지난 추석 연휴에도 고향이 아닌 국회를 찾은 이들이 상당수였다고 한다. 한 대기업의 국회 담당자는 “회장님 출석만은 막아야 한다. 회장님 대신 다른 실무진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기업들의 이러한 ‘사전 로비’는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할까. 실제로 국감이 시작된 지 일주일여가 지났지만 국감장에 모습을 드러낸 재벌총수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증인 채택마저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12일 기획재정위원회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이 과정에서도 여야간 실랑이가 계속 됐었다. 대대적인 재벌총수 소환이 예고됐던 국감 전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상황인 것.
▲ 지난 11일 정무위원회의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장에서는 증인으로 채택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등 재벌 총수 일가가 출석하지 않았다. 일요신문 DB |
이에 대해 환노위 야당 간사를 맡고 있는 민주통합당 홍영표 의원실 관계자는 “환노위가 여소야대라고 해서 표결처리로 증인을 채택하면 야당 의원이 소수인 다른 상임위는 어떡하겠느냐.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증인을 조율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홍영표 의원은 표결처리로 하자고 계속 주장해 왔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19대 국회 들어서 환노위의 경우 여야 간사 의원 단둘이 증인 명단을 조율하고 있다”면서 “18대 때까지는 보좌진도 배석했었는데 19대 들어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이 보좌진은 들어오지 말라고 해 증인 채택과 관련한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어차피 여야 간 조율 과정에서 빠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일요신문>이 이재용 사장의 증인 명단 제외 사실 확인 전에도 삼성 측은 느긋한 분위기였다. 삼성 관계자는 “총수 이름이 국감 증인 목록에 오르는 것은 해마다 있었던 일 아니겠느냐. 올해도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태와 관련해, 9월 26일 태안유류피해대책특별위원회의 증인으로 채택된 이건희 회장은 지난 4일 일본출장을 나선 데 이어 11일 일본에서 바로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11일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 역시 11일 베트남으로 출국해 이 회장과 합류해 중국 방문까지 동행할 계획.
삼성 측은 “애초 예정된 출장길이었고 국감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국감을 피하기 위한 회피성 출장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일축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재용 사장은 국감 증인으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도 않았는데 국감을 피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도 “태안 특위 일정은 국감이 끝난 후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회장의 출국 역시 국감과는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 정몽구 회장과 이재용 사장. |
이처럼 매해 재벌 총수들의 국감 회피성 출국이 반복되지만 현재로선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것이 재벌 총수들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형’이다. 그 또한 수백 만 원의 벌금형만 가해진 게 현실이었다. 정무위 국감장에서도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은 “재출석 요구에도 응하지 않으면 국회법에 따라 고발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들이 재출석 요구에 응할 리는 만무다. 이런 세태에 대해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무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환노위가 여소야대로 구성돼 가장 큰 기대를 받았음에도 민주통합당마저 재벌 총수 소환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니 참 씁쓸하다. 출석 요구를 해도 응하지 않는 마당에 증인채택조차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의문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