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27일 SK㈜가 1조 원대의 자사주를 매입하겠다고 밝혀 관심을 모은다. 사진은 지난 9월 21일 SK 주관, 국정홍보처와 중국신문판공실 주최의 감지중국 한국행(感知中國 韓國行) 행사에 참석한 최태원 SK 회장. | ||
SK㈜는 이번 발표에 대해 급작스런 발표가 아니라 이미 연초에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적이 있고 이 약속을 지키는 차원에서 실행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SK㈜의 이 발표는 타이거펀드의 ‘한국 컴백’ 소식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타이거펀드는 지난 97년 외환위기 직후 SK텔레콤 지분을 대거 사들인 뒤 SK텔레콤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을 유발하면서 결국 SK텔레콤에 수천억 원대의 차액을 남기고 되팔았다. SK그룹은 타이거펀드 때문에 경영권 방어 홍역을 치른 뒤 외국계펀드인 소버린으로부터 또 경영권 위협을 당했다. 소버린은 지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SK㈜의 주식을 매집한 뒤 경영 참여를 이유로 SK의 경영진을 물고 늘어졌다. SK 사태 여파로 SK그룹의 주력사인 SK㈜ 주가가 1만 원대 이하로 폭락했을 때 기습적으로 주식을 사들인 소버린은 결국 8000억 원대의 차액을 거두고 SK㈜에서 손을 뗐다. 최근 6만 원대의 주가는 바로 소버린 덕(?)에 조성된 주가이기도 하다. 외국계 펀드의 국내 대기업 ‘주식 매집을 통한 경영권 공격’, ‘거액의 차익 실현’이라는 공식이 하필이면 모두 SK그룹 계열사, 그것도 SK그룹의 양대축인 SK텔레콤과 SK㈜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미 외국계 펀드의 경영간섭의 ‘위력’을 경험해서일까. 그 타이거펀드가 최근 코스닥 등록업체인 이상네트웍스의 주식을 사들이면서 국내 시장에 컴백하자마자 SK㈜는 1조 원대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것이다.
재계에선 SK가 외국계 펀드의 집중공략 대상이 됐던 이유를 최태원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지분이 2세 승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2세 승계과정에서 이렇다할 정재계의 우군도 없었고, 오너의 현금력도 미약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번 SK㈜의 자사주 매입 선언을 보면 하나은행이 주요 파트너로 등장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총수가 구속됐던 SK 사태 이후 SK와의 협력관계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SK그룹의 3대 주력사 중 하나인 SK네트웍스가 SK 사태 이후에도 SK의 계열사로 남아있을 수 있고, 흑자로 반전해 경영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은행이 주채권은행으로서 SK 최 회장의 경영권을 사실상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은행도 SK네트웍스의 경영정상화를 통해 상당한 이득을 보기도 했다.
이번에 하나은행은 또 한번 SK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SK㈜는 하나은행에 자사 소유의 주유소 166개와 충전소 7개 등 모두 174곳의 부동산 자산을 부동산처분신탁 형식으로 하나은행에 매각했다. 매각대금은 4700억원. 하나은행은 이 신탁을 받아 4700억원어치의 공모사채를 발행해 이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채이자를 얻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방식을 통해 SK의 주유소 경영권은 그대로 SK그룹 소유로 남아있게 되고 하나은행은 5년 뒤 이를 SK인천정유가 되사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물론 SK도 1조 원대에 달하는 자사주 매입대금의 반을 이번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게 됐다.
SK는 고정부동산을 유동화시켜 경영권 방어와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는 자금을 얻었고 하나은행은 이자수입을 얻는 윈-윈 게임인 셈이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점은 SK그룹의 핵분열에 이번 거래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여부이다.
알려진대로 SK네트웍스의 옛 이름은 ㈜선경으로 SK그룹의 모태다. 창업자 최종건 회장이 세운 회사로 90년대 이후 SK유통, SK에너지판매를 흡수 합병하면서 유통, 에너지판매, 이통통신 대리점, 의류업을 겸하는 SK그룹 주력사의 종합판매채널로 변신했다. 하지만 최종건 회장의 2세인 최신원 SKC 회장이 선대가 창업한 SK네트웍스에 관심이나 연고의식이 큰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문제는 SK네트웍스가 인수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덩치가 워낙 커지고 SK사태 여파로 채권단 관리로 넘어가면서 최신원 회장 쪽 집안에서 연고를 주장하기에는 버거워졌다는 점이다. 이는 최신원 회장가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 SK㈜의 ‘자산유동화’에서 보듯 SK그룹 주력사들이 잇따라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산 매각, 사업 재편이 시도되면서 SK그룹 전체 구도가 재정비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사촌간인 최신원 회장 일가와 최태원 회장 일가간의 재산분할이라는 빅딜이 사업구조 재편과정에서 촉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SKC와 SK건설-SK케미칼은 최신원 회장과 최신원 회장의 동생인 최창원 부사장 계열로 판명이 난 상태다. 다만 독립에 필요한 지분 확보가 미약해 분리가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SK㈜의 부동산 자산 매각처럼 그룹 계열사 간에 자산매각과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자사주 확보 흐름이 이어질 경우 대주주 일가의 지분 확보나 재산 분리를 촉진시킬 가능성이 커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편 재계에서는 외국계 펀드의 경영권 위협 공세에 두 번이나 당한 SK그룹이 발빠르게 자사주 매입 확대 선언을 또 다른 의미에서 주목하고 있다. 이미 주식시장에서는 올들어 ‘기업구조개선’ 차원에서 장하성펀드가 태광그룹의 계열사에 ‘투자’하면서 주가가 크게 뛰자 몇몇 펀드나 투자가들이 ‘기업구조개선’을 요구하며 주식매집에 나서는 게 하나의 테마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다. 그동안 기업지배구조개선에 수수방관하던 국내 연기금도 ‘확보지분 만큼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게다가 타이거펀드 등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선수’들이 한국시장에 속속 입장하고 있다. 때문에 증시 주변에선 국내 대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선언이나 ‘경영권 위협시 서로 도와주겠다’는 백기사 선언이 줄을 이으면서 한동안 주식시장에 ‘자사주 재료’가 널을 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