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대파·이종섭 이슈 타이밍 엇박자, 호재가 악재로…‘늘공’ 일변도 인선 부작용 지적도
바둑엔 ‘수순’이라는 말이 있다. 수를 놓는 순서를 의미한다. 똑같은 수를 놓더라도 수를 놓는 순서에 따라 판세가 뒤바뀔 수 있다. 운용의 묘 영역이다. 정치에서도 우선순위 경중에 따라 수순을 달리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이 영역을 담당하는 건 ‘정무 파트’다.
총선 이후 대통령실을 둘러싼 정무 부재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참모들이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한 것이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 정무 파트는 공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서 “대통령실은 행정에 정치가 곁들여져야 하는 영역인데, 정치와 관련한 조언을 하는 참모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정무 라인이 제대로 가동됐으면 이번 총선이 이처럼 원사이드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 여당 및 야당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책적으로도 정치적 함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지성 돌격으로 일관한 것이 냉혹한 중간고사 성적표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총선이 치러지기 전 보수진영 내부에서도 대통령실 정무 부재에 대한 아우성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수정당 정무 파트에서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3월 말 일요신문과 만나 “현 상황으로 보면 여당이 110석만 넘어도 ‘선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서 “그만큼 상황이 어려운데, 여론이 정치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여당을 선택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이 관계자는 “정당, 인물, 바람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에 앞서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민생”이라면서 “민생은 곧 경제고, 유권자들이 체감하는 경제지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물가”라고 했다. 그는 “임기 초반 대통령 힘이 가장 강력한 시기에 충분히 이런 부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대통령실 움직임은 미적지근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까지도 대통령실은 ‘문재인 정부’ 탓을 자주 한다. 임기 3년 차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전 정부 탓’은 먹히지 않는다. 보수 정권 특성상 ‘전 정부 탓’은 임기 초반 힘이 강할 때 돈줄을 강하게 조이는 드라이브를 걸며 활용해야 한다. 정무적으로 보면 강력하게 물가를 먼저 잡고 선거 전에 돈을 푸는 수순이다. 이런 부분을 정치적으로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정무수석뿐 아니라 대통령실 전반적으로 정무 감각이 떨어져 있다. 대파 논란이 발생한 근본적 이유로도 볼 수 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실 정무 공백으로 인한 민심 이반 현상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정무 공백 사례로는 의대 증원 이슈, 대파 발언 논란, 이종섭 출국 등이 꼽힌다. 여권에선 “이렇게까지 커질 일들이 아닌데, 대응 타이밍이나 밀어붙이는 타이밍 등이 모두 엇박자가 났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전반적으로 운용의 묘만 살렸으면 충분이 예방 가능했던 악재라는 의미다.
특히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온 의대 증원 관련 대통령 담화는 정무 파트 최대 실책으로 거론된다. 한 수도권 여권 선거캠프 관계자는 “의대 증원 이슈가 처음 제기됐을 땐 대통령 지지율이 올랐다”면서 “그런데 그때가 3개월 전”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의대 증원 이슈가 장기전으로 접어들며 이슈 피로도가 높아졌고, 총선 전엔 급기야 ‘호재’가 ‘악재’로 변해 버렸다”면서 “그런데 총선을 코앞에 두고 큰 의미 없는 담화로 악재를 부각시켰다. 정무적으로 명백한 실수로 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 정무 공백 원인으로 ‘늘공 일변도 인사’를 꼽았다. 여권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외길인생을 걸어온 늘공 출신”이라면서 “한덕수 총리, 김대기 전 비서실장, 이관섭 비서실장 등 대통령실 수뇌 라인이 모두 늘공 출신”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늘공 출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늘공의 우직함과 어공의 유연함이 어우러져야 상생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실 인사에 있어서 늘공 편향 기조가 ‘불통 이미지’를 가속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오섭 정무수석은 늘공은 아니지만, 여의도 경험이 없어 인사 당시에도 의외라는 평이 있었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한오섭 정무수석은 2023년 11월 취임 당시부터 ‘여권에서도 생소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 정무수석실 행정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정무특보, 김병준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 비서실 부실장 등을 지냈다. 행정부와 입법부 가교 역할을 하는 정무수석은 ‘여의도 민원수석’이라는 별칭이 있다. 물밑에서 여야와 소통하며 국정운영 중심을 잡는 데 기여를 해야 하는 직책이다.
총선이 국민의힘 참패로 끝나면서 대통령실 수뇌부와 정무수석은 교체 대상으로 떠올랐다.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동시에 교체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총선 이후 정무 공백이 부각되다보니, 거물급 정치인을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으로 전면 배치하는 전략도 거론된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비서실장 유력후보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정무수석 하마평에 오르는 상황이 이어졌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실 정무 공백과 관련해 “정무 파트는 야당과 접촉하면서 여론 동향을 가감 없이 파악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신 교수는 “총선 직전 윤석열 대통령 담화 이후 대통령실 입장 등을 보면 말이 오락가락 바뀐다”면서 “대통령실이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향후 대통령실 인사개편 방향성과 관련해 신 교수는 “국무총리나 장관은 국민을 의식해야 하지만, 대통령실 인사는 이와 결이 조금 다르다”면서 “대통령실은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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