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금강산에서 고 정몽헌 회장의 추모식에 참석한 현정은 회장. 뒤에 장녀 지이 씨가 보인다. | ||
겹겹이 쌓인 악재들 중 현 회장을 가장 괴롭히는 사안은 바로 금강산 관광일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일인 동시에 현대그룹 정통성 계승자를 자처하며 현대건설 인수전에 의욕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업적 측면에서도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 경영 전체를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알토란 같은 금강산 관광이 흔들리고 있다. 정몽헌 회장 사후 여러 번 대북사업 위기론이 불거졌었지만 이번엔 심각함의 정도가 다르다. 금강산 관광에 대해 비판을 삼가던 한나라당이 ‘사업 중단’을 외치고 나선 것을 기점으로 금강산 관광은 국내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가 돼 버렸다. 국제무대에서 북핵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미국이 대북사업을 비난하고 나섰으며 국내 일각에서도 ‘금강산 관광 폐지론’이 나오는 실정이다. 금강산 관광에 대한 북한의 반응 또한 현 회장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것으로 점쳐진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현정은 회장의 금강산 관광은 가장 춥고 혹독한 겨울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이 장기간 파행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10월 29일 기자회견을 통해 ‘1998년 이후 금강산 관광 사업 관련 대금 6억 달러가량이 북한군과 노동당 등에 유입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 언론은 ‘대북사업은 김정일의 현금인출기’란 표현을 써가며 결국 남측의 대북지원이 북핵 파문을 불러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금강산 관광 대가로 지불한 돈이 북한 군비를 증강시켜 핵 실험을 불러왔다’는 보수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금강산 관광객이 줄어든 것은 당연지사다.
추위 때문에 겨울 관광객이 평소보다 적은 점이나 금강산의 가을 경치가 유명한 점 등을 고려하면 현대 입장에선 가을이 ‘대목’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국제정세와 국내 보수여론이 맞물려 가을 대목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번 겨울은 어느 해보다 금강산 관광이 호재를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전경련 차기 회장설이 나도는 몇몇 기업인이 연말 완공되는 금강산 골프장 개장에 맞춰 경제인들과의 라운딩을 계획했던 상태였다. 이에 맞춰 경제인 단체들이 금강산에서 국제평화행사 개최를 준비해왔다는 소문도 있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돼 화제가 된 그룹사운드 U2가 올 연말 금강산에서 공연할 것이란 소문도 파다하게 나돈 바 있다. 그러나 북핵 파문 이후 이 행사들에 대한 소문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남측이 미국의 북한 제재에 동참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를 한 바 있다. ‘비싼 대가’란 2차 핵 실험을 포함한 북한의 모든 무력시위로 풀이된다.
대북 사정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북한도 남한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탓에 남한의 대북 제재 동참 여부보다는 금강산 관광 문제 처리방향을 주시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평한다. 국내 보수여론과 미국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재와 북한 군사력을 불려주는 원흉으로 지목한 금강산 관광에 대한 남한 정부의 입장을 북한이 지켜볼 것이란 관측이다. 이 인사는 “북한 입장에선 매년 수천만 달러 수입을 보장하는 금강산 관광이 어느 대북사업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자칫하면 금강산 관광 존폐 여부가 북-미 대립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고 평했다. 현 회장과 현대그룹 전체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르는 금강산 관광의 미래가 북-미 힘겨루기 결과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북 문제에 정통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대북사업은 항상 대반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대북 평화무드가 조성되면 그만”이라 관측한다. 6자 회담의 성공적 개최 혹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남북정상회담이나 이를 위한 실무접촉 성과가 공개될 경우 대북사업은 다시 활기를 띄고 금강산 관광 또한 안정적 운용이 가능해질 것이란 평이다.
그러나 북핵 파문 직전까지 북한이 대북사업에 대해 취해온 스탠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북한은 얼마 전까지 ‘현대가 독점해온 대북사업 주체를 교체할 것’을 요구해온 바 있다. 이는 현대의 사업 독점권을 깨고 자금 동원력이 풍부한 다른 재벌기업들의 대북 사업 참여를 유도해 결국 북한의 잇속을 차리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북핵 문제가 일단락되면 북한은 또 다른 잇속을 차리기 위해 현 회장의 현대그룹 경영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현 회장이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지분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내용의 소송을 당한 것을 두고 현대의 대북투자 능력을 의심하려 할 것이란 평이다. 이는 곧 북한이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권을 깨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것이란 관측이다. 이래저래 금강산 관광을 둘러싼 현 회장의 주름살은 깊어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