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정무위원회는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은 대형 유통업체 재벌에 대한 청문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
대형 유통업체들이 국정감사 시즌이 끝나자마자 잔뜩 긴장하고 있다. 대개 국감이 시작되기 전 긴장하게 마련인데 신세계, 롯데, 현대백화점 등 유통 대기업들은 오히려 국감 이후가 더 좌불안석이다. 대형 유통업체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팽배한 가운데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압박하고 나선 것. 재계 고위 관계자는 “지금껏 국감이 끝나고 나면 강도 높은 압박 수위가 완화되는 분위기가 강했다”며 “이번에도 그럴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던 대형 유통업체들로선 대응하기 난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정무위는 오는 6일 유통 재벌에 대한 청문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청문회는 이미 유통 재벌 총수들이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예고된 바 있다. 이전까지 ‘엄포’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실현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이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다. 이들 4명은 모두 지난 11일 공정위 국감에 불출석했으며 23일 종합감사에도 해외 출장 등의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4명의 유통 재벌들은 현재까지 청문회도 불참할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역시 해외출장. 신세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세계식품박람회를 참관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고 정 부사장은 해외업체와 국내 사업 독점권 계약 관계로 미국 출장 중”이라며 “두 분 모두 국내에 안 계셔서 현재로서는 청문회에 참석할지 못할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 역시 “회장님은 계약 문제 때문에 현재 유럽 출장 중”이라고 말했다. 신동빈 회장 역시 해외 출장 중이다.
이들이 청문회가 열리는 오는 6일까지 귀국해 청문회에 참석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업계에서는 비단 해외 출장을 핑계대지 않더라도 이들이 청문회에도 불참할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국회 정무위는 이들이 청문회마저 불참할 경우 ‘검찰 고발’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월 초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국감에 영국 본사 회의 참석을 이유로 불참했던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은 지난 24일 종합국감에는 최병렬 이마트 대표, 노병용 롯데마트 대표 등과 함께 얼굴을 내비쳤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지경부와 함께 유통산업발전협의체(가칭) 발족도 협의해야 하고 종합감사에도 참석하기 위해 급히 귀국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의가 있었다면 이미 지경위 국감에 참석했을 것이란 얘기다. 지경위 국감에는 불참하고 급히 귀국해 종합감사에 참석한 것은 다분히 ‘청문회’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이 회장은 오너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유통 재벌과 입장이 다르다”며 “한국체인스토어협회 회장으로서 협의체 발족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해명했다.
유통 재벌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경제개혁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 ‘검찰 고발’, ‘공정위 신고’ 등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해 신세계·이마트 임원 3명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이들은 정유경 부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데이앤데이’, ‘달로와요’ 등 베이커리 사업에 부당지원을 했다는 것. 공정위는 10월 초 신세계가 정 부사장의 베이커리 사업을 부당지원했다는 이유로 4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결국 정 부사장은 베이커리 사업 지분을 모두 정리했다. 그러나 정 부사장의 지분을 모두 사들인 신세계SVN을 신세계에서 계속 운영키로 해 생색만 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불필요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정 부사장의 지분을 정리했을 뿐 신세계의 베이커리 사업은 골목상권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계속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부사장이 지분을 정리한 데는 경제개혁연대의 고발도 있었지만 정 부사장의 청문회 출석과도 관련이 있다. 재벌가 딸들의 빵집사업 논란이 한창이던 올 초에도 ‘골목상권과 관련 없다’며 버티던 정 부사장이 결국 베이커리 사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원래 부진했던 사업을 이참에 명분 좋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유야 어쨌든 정 부사장의 철수는 국감 이후 시련이 거세진 대형 유통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감 이후 대형 유통업체들이 떨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더욱 강화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올해 안으로 국회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 개정안에는 대형 유통업체의 의무휴업일수를 4일로 늘리고 영업시간도 더욱 제한하는 등 강도 높은 규제가 포함돼 있다. 게다가 이를 위반할 경우 사업등록마저 취소될 수 있다.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는 “의무휴업 2일도 타격이 큰데 만약 개정안이 시행돼 4일을 쉬어야 한다면 매출이 40% 넘게 추락할 것”이라며 “이는 결국 인력 구조조정과 협력업체들의 어려움으로 이어져 상생이 아니라 공멸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토로했다.
대형 유통업체들의 영업규제에 대한 취소 소송이 잇따르고 있지만 여론과 분위기를 돌려놓기는 역부족이다. 지경부 중재로 11월 15일까지 자율휴무와 출점 자제 등을 논의하는 ‘유통산업발전협의회’를 발족키로 한 것도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여론과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자구책이라는 해석도 적지 않다. 협의회 발족을 계기로 대형 유통업체들은 영업제한 취소 행정소송을 취하할 뜻도 밝혔다.
현 상황은 대형 유통업체들에 유리할 것이 없어 보인다. 더욱이 대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정치권과 여론이 대형 유통업체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줄지도 의문이다. 유통 재벌들이 마냥 하소연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