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생명 건물. | ||
얼마 전 별세한 고 이종기 전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넷째 사위로 중앙일보 대표이사와 삼성화재 회장을 지냈다. 고 이 전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병철-이건희 총수부자가 집무실 겸 영빈관 등으로 사용했던 서울 이태원동 소재 승지원 일대 토지가 한때 고 이 전 회장 명의로 돼 있었을 정도로 고 이 전 회장은 삼성 총수일가의 집안 대소사에 최측근 역할을 맡아왔다.
이런 관점에서 고 이 전 회장이 갖고 있던 삼성생명 지분은 총수일가가 고 이 전 회장 명의를 통해 따로 보관해온 지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톡옵션 제도가 없을 당시 삼성그룹에선 비상장주식인 삼성생명 주식을 특별상여금으로 활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족 측에 따르면 이 지분은 고 이 전 회장의 사회환원 의지에 따라 삼성생명공익재단에 증여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공재단에 지분을 증여하면 별도의 증여세가 붙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고 이 전 회장이 갖고 있던 지분을 총수일가나 다른 계열사에 넘기면 막대한 증여세를 물어야 한다.
▲ 고 이종기 삼성화재 전 회장. | ||
고 이 전 회장의 지분 증여를 범 삼성가와의 이해관계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삼성생명의 최대주주는 신세계다. 이건희 회장 여동생 이명희 회장의 신세계는 삼성생명 지분 13.57%를 갖고 있다. 삼성에버랜드가 13.34%를 보유해 2대 주주에 올라있으며 이건희 회장의 조카이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손인 이재현 회장의 (주)CJ가 7.99%를 보유해 3대 주주에 올라있다.
그런데 ‘비금융계열사가 금융계열사 지분 5%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에 따라 삼성에버랜드가 지닌 초과지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삼성에버랜드가 지닌 삼성생명 지분에 변동이 생긴다면 삼성생명 지분구조상 절대적 지위에 놓이게 되는 신세계와 CJ가 삼성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삼성그룹이 과연 신세계나 CJ와 마냥 우호적인 관계라고만 볼 수 있는가에 있다. 올해 신세계 측은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1조 원가량의 상속세를 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삼성 일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당장 ‘국민정서법’상 “10조 원 미만의 연간매출액을 기록하는 신세계의 상속세가 1조 원이면 연간 120조 원이 넘는 매출액을 올리는 삼성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상속세를 얼마나 내야 하나”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게다가 이종기 전 회장의 사망 이후 20여 일이 지난 뒤에야 그의 사망 소식과 유산 처리 향방이 동시에 발표된 이유에 대해서도 재계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번거롭지 않은 장례절차’를 원했던 고인의 뜻일 수도 있지만 삼성생명의 경영권 향방을 가를 수도 있는 고인의 삼성생명 지분 처리 문제를 두고 삼성가에서 ‘협의’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그가 삼성가의 대소사를 맡아서 처리했다는 점, 그리고 고인의 유족들이 이렇다하게 삼성그룹 계열사 자산을 물려받은 게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만약’ 그의 지분이 신세계나 CJ에 유리하게 움직였다면 삼성의 지배구조는 뿌리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CJ의 경우 분가과정에서 앙금이 쌓인 뒤로는 ‘이건희 회장의 삼성’과는 ‘불가근 불가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검찰에서 수사중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의혹 사건에 임하는 CJ의 자세도 그런 예다. CJ는 지난 1996년 전환사채 배정 당시 실권하지 않았다. 검찰은 당시 CJ가 삼성으로부터 전환사채 배정 포기 요구를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CJ 손경식 회장을 상대로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삼성과 신세계 CJ의 사이는 재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아왔다. 이들 범 삼성계가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삼성과는 언제든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삼성총수일가는 경영권 수성을 위해 삼성생명에 대한 우호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야 할 상황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이사장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사회환원 사업을 하는 공공재단이기는 하지만 의결권 행사과정에서 이 재단이 삼성 총수일가에 대한 우호지분 역할을 해줄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결국 증여세 부담 없이 공익재단을 이용해 삼성생명 지분의 누수를 막았다는 평이 제기될 수 있는 셈이다. 한편 고 이 전 회장의 지분 증여에 대해 삼성 측 인사는 “공익재단에 증여한 것이니 좋은 일에 쓰기 위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라 밝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