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친 장삼자락, 허공을 수놓고…연이은 북소리, 뭇 가슴을 흔드네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는 이른바 ‘국민 시(詩)’라 할 만하다.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오랜 세월 애송해 온 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승무’ 그 자체의 경우는 어떨까. 시인이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던 전통춤 승무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승무는 장삼과 고깔을 걸치고 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다. 장삼은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 승려의 웃옷을 의미하고, 고깔은 승려나 무속인 등이 쓰는, 위쪽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를 뜻한다. 무용가의 복장이 승려의 옷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중춤’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과는 사뭇 다르다.
승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불교문화사적 입장에서 본 불교 유래설과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서 나왔다는 설, 탈놀음 중에서 노장춤과 파계승의 번뇌에서 비롯된 춤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다만, 현존하는 승무를 검토해 보면, 지난 시대의 승무 전수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광대나 기녀들에게 춤을 전수받았고, 주된 춤사위 또한 ‘기녀무’인 살풀이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승무는 조선 후기의 광대, 교방 예술인들이 이미 그 이전부터 행해졌던 사찰에서의 승려 무용과 남도 살풀이 춤 또는 궁중무와 탈춤의 한삼춤에 영향을 받아 교방 예술로 재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교방이란 조선 시대에 기녀들을 중심으로 가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구한말에 교방청이 폐지되면서 광대, 기녀 등 예인들이 기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예술적으로 형식을 갖춘 민속춤으로 발전된 것이 오늘날의 승무라 할 수 있다.
승무는 무용수가 흰(때론 검은)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흰 고깔을 착용한 채 양손에 북채를 쥐고 홀로 춤을 추는 독무(獨舞)다. 피리, 젓대, 해금, 장고, 북 등 삼현육각으로 반주하는 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동작으로 고뇌와 염원을 표현한다. 특히 장삼소매를 뿌리는 동작이나 장삼자락을 휘날리게 하는 팔동작은 공간을 아름답게 수놓는 춤의 백미로 꼽힌다.
승무는 무대 안쪽 중앙에 놓인 북틀 앞에 무용수가 무대를 등지고 엎드린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이다. 정면을 등지고 양팔을 서서히 올릴 때 생기는 유연한 능선, 긴 장삼을 공간으로 뿌리는 춤사위가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어깨춤은 긴 장삼자락까지 수면에 이는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파장이 다시 허리와 다리를 타고 버선코 끝으로 표출된다.
염불 장단에 이어진 타령,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던 무용수는 양손으로 북채를 어르다 이내 북치기를 시작한다. 리듬을 타며 북을 연타하는 모습에 마치 주술에라도 홀린 듯, 관객은 저마다 몰입해 숨을 죽인다. 잠시 후 북소리가 멎고 다시 긴 장삼이 허공에 뿌려진다. 무용수는 연풍대(한 발을 내디디며 유연하게 회전하는 춤사위)를 돌고 어깨춤에 사뿐한 걸음이 이어진다. 점차 춤은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깃드는 동중정(動中靜)의 상태로 수렴된다. 마지막으로 무용수가 합장을 하며 춤이 끝난다.
승무는 달고 어르고 맺고 푸는 리듬의 섬세한 표현과 초월의 경지를 아우르는 춤사위의 오묘함이 조화된 춤이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고 승화시킨 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무용 특유의 ‘정중동·동중정’의 정수가 잘 표현되어 민속무용 중 가장 예술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1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한국인 학교인 인성학교는 부족한 운영 경비를 입장료와 기부금으로 보충하기 위해 신년음악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 당시 영국의 무도 등 여러 가지 춤과 노래를 선보였는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전통춤으로 무대에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승무였다. 타향에서 펼쳐진 승무의 춤사위는 한인 교포들의 심금을 울리고 중국 사람들의 박수갈채까지 받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24년 1월 14일자 기사 참조). 이 일화는 승무가 단순한 민속춤을 넘어, 우리 민족이 사랑하고 또 나라를 빼앗긴 한을 위로받던 상징적 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간 승무는 지역마다 조금씩 특징을 달리하여 전승되어 왔는데, 1900년 이후 무용가 한성준의 노력으로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경기·충청 지방의 승무와 무용가 이대조에 의하여 발전된 호남지방의 승무로 구분된다. 한성준의 승무는 한영숙에게, 이대조의 승무는 이매방에게 전승되어 각각 한영숙류와 이매방류로 발전했다. 한영숙류는 이애주와 정재만이 계승하여 승무 예능보유자로 활동했으며, 이매방류는 현 승무 보유자인 채상묵에게 이어지고 있다.
자료협조=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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