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골공예, 생활용품을 넘어 작품이 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예부터 왕골을 재료로 다양한 기물을 만드는 전통공예로 유명했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로 완초, 용수초, 현완, 석룡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골을 이용해 자리(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바닥에 까는 물건), 돗자리, 방석, 송동이(작은 바구니), 합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만들어졌는데, 이처럼 왕골로 기물을 만드는 전통 기술 또는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일컬어 완초장(莞草匠)이라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이미 귀족층을 중심으로 왕골 제품이 쓰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5두품, 6두품이 밖에 다닐 때 완초 자리를 쳤는데, 그 테두리를 견직, 가죽 등 어떤 재질로 만드느냐에 따라 등급을 구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때에는 왕골 제품을 귀히 여겨 왕실에서 주로 사용하였고, 사직신의 신위에도 왕골 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짠 품이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고 고려 자리의 품질을 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 왕골공예는 더욱 발전하였고 쓰임새 또한 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영을 내려 왕골을 키우도록 지시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조선 초기에 왕골 제품은 궁중이나 상류계층에서 귀중품으로 취급되었는데, 백성이 키운 왕골을 강제로 취하는 일들이 빚어지자 태종이 이를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 또한 왕골 돗자리와 방석 등은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 사용되었고, 외빈에게 주는 답례 선물로도 쓰였다. 조선의 용문석(용의 무늬를 놓아 짠 돗자리), 화문석(꽃무늬 돗자리)이 아름답고 우수해 중국 황실은 물론 사신들이 여러 차례 선물로 요구한 사실이 실록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완초장에 해당하는 석장(席匠, 돗자리를 만드는 장인)을 지방 관아에 소속시켜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왕골 제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각 지방의 석장들은 왕골공예의 전문가로 지역별로 특색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순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에는 경기도 강화 교동을 비롯해 영남 예산, 황해도 백천과 연안의 화문석이 유명했던 것으로 기재돼 있다.
한 줄기 왕골이 하나의 공예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째는 왕골을 선별하여, 실 가닥처럼 쪼개어 가공하는 과정, 둘째는 왕골 실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처리 과정, 셋째는 색을 입힌 왕골 실을 적절히 배열하고 씨줄과 날줄로 엮어 미적 요소를 살려내는 과정 등이다. 완초장은 이 모든 과정에 능해야 하니 왕골을 다루는 기술과 감각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미적 안목까지 지녀야 한다.
전통 왕골공예의 제작 기법으로는 도구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과 손으로 엮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날줄(자리를 짤 때 세로 방향으로 놓인 왕골 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도록 성글게 짜는 ‘노경소직’이고, 다른 하나는 날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촘촘히 짜는 ‘은경밀직’이다. 일반적으로 자리와 방석 등은 노경소직으로, 돗방석과 돗자리는 은경밀직으로 제작된다.
손으로 엮는 방법은 왕골 4날(자리 등을 엮을 때 세로로 놓는 왕골 실)을 반으로 접어 총 8개의 날줄을 정(井)자형으로 엮은 후, 두 개의 씨줄을 엮어 만드는 방식이다. 이 기법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손 감각이 필요하며, 8각 및 원형의 방석을 비롯해 삼합, 송동이 등 다양한 제품을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다.
완초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초대 완초장인 고 이상재 선생이 바로 손으로 엮는 왕골공예의 대가였다. 선생은 고드랫돌, 돗틀과 같은 제작 기구를 다루는 데도 능했지만, 기구 없이 갈구락지(왕골 가닥을 꼬아 날줄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나 골방망이 같은 기초 도구와 손만으로 작품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가 완성한 왕골 공예품은 올이 매우 고르고 안팎이 정연하며 문자나 꽃, 학 등의 무늬와 구도도 매우 자연스러워 평론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가 오랜 생활문화유산인 왕골공예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었다. 한때 왕골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다채로운 현대 물품이 자리나 방석을 대체하면서 설 자리를 점차 잃고 있다. 생전에 이상재 초대 완초장이 모자 가방 액세서리 등 과거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왕골 제품을 만들어 대중과 소통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현재 완초장은 기능보유자가 없는 상태로, 그의 아내인 유선옥이 전승교육사로, 양인숙이 명예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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