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정체성, 아름다운 우리 옷에 깃들다
이들의 의견은 대체로 “개량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모아졌지만, 전통 한복에 대한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개량 여성 한복’을 시험 제작했던 김원주는 “몇 십백 대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한복은 의례적으로 보든지, 미적으로 보든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다”고 밝혔다. 나혜석은 “실로 아름답고 가벼우며 편한 의복은 우리가 지금 입은 옷”이라며 “치마 주름의 선으로부터 가슴 한가운데 깃의 선과 섭 자락의 선이며 도련(저고리나 두루마기 자락의 가장자리)은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조화를 가일층 더해준다”고 평했다.
우리 민족은 이처럼 아름답고 실용적인 전통 의복인 한복을 과연 언제부터 입었을까. 고구려 고분 벽화, 신라의 토우(흙으로 만든 사람의 상), 중국의 사서 등으로 미루어 보면, 적어도 고대부터 한복을 입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학자들은 삼국 시대에 바지·저고리 또는 치마·저고리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 복식의 기본 양식이 완성되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우리 복식의 전형이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복’이라는 용어는 개항(1876년) 이후 서양 문물로 들어온 양복과 우리 옷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1년 ‘승정원일기’ 내용 중에 ‘조선의’(朝鮮衣)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1894년 일본 신문 기사에 ‘한복’이라는 단어가 명시돼, 그 시절에도 한복이 우리의 생활문화 및 민족의 특성을 담고 있던 대표 복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한복 문화는 1900년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되어 문관들이 예복으로 양복을 입게 되면서부터 한복·양복의 혼합 문화로 전환되었다. 19세기 말 서양식 의복의 도입으로 인해 우리 고유의 의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상복은 복식이 간편한 서양식 의복으로 차츰 대체되고, 한복의 형태도 크게 간소화됐다. 또한 한복이 주로 관혼상제 등에서 ‘의례복’으로 쓰이는 등 그 쓰임새도 일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어져 온 한복 문화는 설, 추석 등 명절을 비롯해 돌잔치, 결혼식 등 일생의 의례를 통해서 여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특히 예를 갖추는 차원에서 한복을 차려입는 전통 복식의 근간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올해 문화재청은 다양한 공동체를 통해 전승되고 있는 ‘한복생활’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새로 지정했다. 한복생활이란 한복을 지어 착용 순서대로 입고, 예절이나 격식이 필요한 의례·관습·놀이 등에 맞춰 향유하는 문화를 뜻한다. 여기서 한복은 바지·저고리 또는 치마·저고리로 이루어진 고유의 2부식 구조와 함께 옷고름을 갖춘 우리 옷을 말한다. 한복생활은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어 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대표하는 전통 생활관습이자 전통 지식이다.
근대적 산업사회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주부들이 손수 바느질해 한복을 지어 입거나 수선해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설이나 추석, 단오 등의 명절이면 새로이 원단을 장만해 옷을 지어 입었는데, 이를 각각 ‘설빔’, ‘추석빔’, ‘단오빔’이라 하였다. 이처럼 계절이 바뀌는 때의 명절에는 절기에 맞는 한복을 장만하여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 한복은 우리 민족에게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예를 갖추는 중요한 매개체이기에, 한복생활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무형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한복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소박한 염원이 고즈넉이 깃들어 있다. 태어난 아이에게 입히는 첫 옷인 ‘배냇저고리’는 아이의 연약한 피부에 닿기 때문에 부드럽고 자극이 적도록 가능한 한 솔기를 적게 하여 지었고, 오늘날 돌복으로 많이 입는 ‘까치두루마기’의 소매는 색동으로 장식해 벽사(辟邪)와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았다. 상장례에서 망자에게 입히는 수의는 바느질 매듭을 짓지 않았는데, 이는 망자와 자식들이 서로 통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슬픈 역사를 적은 책 ‘한국통사’에는 “안중근 의사가 죽기 전에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전통 의복이고, 한복을 입는 행위 자체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 이른바 ‘한복 공정’까지 일삼는 요즘, 우리가 한 번이라도 더 한복을 떠올리고, 가까이하고, 그 아름다움을 서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옷을 지키는 지혜로운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료 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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