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골드뱅크 주주총회 당시 김진호 사장(왼쪽)과 유신종 이사. 이후 전문경영인으로 골드뱅크와 골드금고 사장을 겸임했던 유 씨가 무리하게 골드금고를 매각하려던 정황이 포착돼 그 배경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
김흥주 게이트가 되살아난 것은 미국으로 도피했던 김흥주 씨가 지난 11월 중순 귀국하면서부터다. 사기 및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은 게이트로 비화되고 있다. 금감원장을 지낸 이근영 씨가 소환되고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 권노갑 전 고문 등 DJ 정권 시절의 실세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한편 검찰 고위직의 이름이 들먹여지고 있다.
김흥주 씨의 ‘혐의’가 게이트 수준으로 비화되는 대목은 골드상호신용금고 매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 때문이다. 2001년 초부터 DJ 정부의 임기만료 직전인 2002년 11월까지 벌어진 골드금고 매각전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첫번째 미스터리는 골드금고 인수전에 DJ 시절 벌어진 각종 게이트의 주역들이 총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드뱅크와 골드금고의 사장을 겸임하고 있던 유신종 씨가 골드금고 매각에 나선 것은 2001년 1월 초.
당시 유 사장은 골드금고를 KEP전자에 100억 원에 매각하기로 하고 계약금 30억 원을 받았다. KEP전자는 ‘이용호 게이트’의 주역 이용호 씨의 자금줄인 김영준 씨 계열의 회사. 김영준 씨는 당시 대양금고의 실질적 소유주이기도 했다. 이들은 대양금고의 부실문제 해결을 위해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골드금고 인수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계약은 틀어졌다. 애초 계약을 맺을 때 단서 조항에 매각 승인을 받는 것은 매수자 책임으로 돼 있었는데 KEP전자가 골드금고의 대주주 변동사실을 금융감독위원회에 신고하지 않는 바람에 주식 양수도 계약 자체가 무효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골드금고 매각 건은 상식 밖의 일의 연속이었다. 유 사장은 협상이 깨지자마자 서둘러 삼주를 상대로 새 협상을 벌였다.
KEP전자와의 협상이 깨지면서 30억 원의 계약금을 ‘망외 소득’으로 챙긴 유 사장은 서둘러 삼주의 김흥주 회장과 계약하면서 계약금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 명의를 서둘러 김흥주 씨로 바꾸는 ‘실수’를 범했다. 계약과 동시에 주식 명의를 김흥주 씨로 바꿔줬지만 김흥주 씨가 중도금을 주지 않아 계약이 깨진 것. 결국 골드금고의 주식 명의만 김흥주 씨로 바뀌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용호 게이트의 주역인 이용호-김영준 씨나 김흥주 게이트의 주역인 김흥주 회장은 왜 인수에 실패했던 것일까.
먼저 이용호 씨 쪽의 실패원인. 이용호 씨는 이용호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인 2001년 7월 작성한 문건을 통해 “골드금고 측이 주식을 팔아달라고 해 계약을 맺었으나 금감원 간부가 개입해 거래가 무산되고 110억 원의 피해를 보았다”는 주장을 했다.
여기서 ‘주식을 팔아달라’는 얘기는 골드금고가 2000년 8월 인수한 우풍상호신용금고의 인수대금 마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 사장은 우풍 인수를 위해 91억 원에 상당하는 유상증자를 실시했는데 96만 주의 실권주가 발생하면서 50억 원이 부족했다. 유 사장은 이를 편법으로 해결했다. 한림창업투자라는 회사에 50억 원의 초단기 자금을 빌려줬고, 한림창투가 지정한 한온 등 3개사가 실권주를 배정받은 것. 우회대출을 통해 유상증자를 성공시킨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골드금고의 돈으로 유상증자를 한 것이다. 이는 나중에 금감원의 시정명령을 받았다.
▲ 이용호 씨(왼쪽), 김흥주 씨. 연합뉴스 | ||
이런 이면거래가 표면화된 게 골드금고 첫 번째 인수 후보로 나선 이용호-김영준-KEP전자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용호 씨는 이 거래가 ‘금감원 간부의 개입’으로 틀어졌다고 했다. 이와 관련 이근영 전 금감원장이 검찰에 조사를 받고 있다. 검찰의 그에 대한 조사 내역 중 하나는 ‘골드금고 매각 후보로 김흥주 씨를 소개해줬다’는 부분.
이번 수사에서 이근영 씨의 소환 조사에서 검찰 관계자는 “김중회 부원장이 ‘이근영 당시 금감원장으로부터 부실금고가 아니라 정상운영 중인 금고를 김씨에게 소개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전 원장은 전날 김 부원장과의 대질신문에서 “골드금고가 부실인지 아닌지 전혀 몰랐다”며 관련 의혹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금감원 간부의 ‘소개’까지 받아낸 김흥주 씨는 왜 골드금고 인수에 실패했을까. 일단 김 씨는 인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월 7일 계약을 맺기 전날 김 씨는 골드금고에 1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대출 신청했다. 그러자 골드금고 노조에서 들고 일어났다. 골드금고 돈으로 골드금고를 인수하려 한다며 대출 자체를 막은 것. 사태가 꼬이자 골드금고는 실사요청을 거부해 삼주의 골드금고 인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골드금고 매각 미스터리는 삼주산업이 등장하면서 더 깊어진다. 삼주산업과 김흥주 씨가 부각되면서 실세 정치인들의 이름이 대거 흘러나온 것.
골드금고 매각 당시 골드금고 임직원들은 매각에 반대했다. 지급준비율 등 부실을 나타내는 척도가 다른 금고에 비해 안정적이었을 뿐더러 매각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수 후보로 나선 이용호 세력이나 김흥주 세력이 골드금고를 통해 인수 작업 전후로 인수금액에 해당하는 거액의 돈을 대출하려고 시도해 거센 반발을 샀다.
이때 등장했던 이름들이 이번에 조사를 받은 이근영 전 금감원장, 권노갑 전 고문, 구속된 김방림 전 의원, 그리고 현역 의원 B 씨, 그리고 DJ 정부의 실세였던 P 씨의 조카다.김방림 전 의원은 결국 구속됐다.
이와 관련 김흥주 씨의 골드금고 인수작업이 한창일 때 골드금고에서는 삼주 배후에 유력 정치인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삼주 쪽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입에서 ‘권 고문, 김 의원, B 의원’의 이름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이번 권 전 고문에 대한 사무실 임대료 지원부분에 대한 검찰조사 결과 일정 부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부터 미스터리는 더욱 증폭된다. 금융계나 관계의 김흥주 인맥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김흥주 씨는 골드금고 인수를 시도하면서 인수팀에 감사원 출신의 김 아무개 씨를 내세웠다. 김 아무개 씨는 율곡비리 감사팀장을 지내는 등 외부에도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공식적으로 감사원을 퇴직한 게 2001년 4월이지만 그는 그해 2월 말부터 삼주 김흥주 씨를 대신해 인수팀장 자격으로 협상에 참여했다. 당시 골드금고 직원들도 정식 계약 이전에 파이낸스센터 빌딩에서 벌어진 협상 자리에 참여한 김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김 씨는 골드금고의 일부 임원도 미리 뽑는 등 자신이 ‘사장’으로 갈 것임을 밝혔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듬해인 2002년 2월 마포구 창전동의 한 아파트에서 추락사했다. 누구도 그의 죽음 현장을 본 사람은 없다. 경찰 조사에서는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가정을 가진 그가 내연녀 집에서 자살했다는 발표는 유족도, 주위 사람들도 납득시키지 못했다.
왜 김 씨가 삼주산업으로 몸을 옮겼는지, 왜 김흥주 씨와 불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찰의 수배 중에 김 씨 빈소를 찾은 김흥주 씨는 “김 씨의 죽음은 삼주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김흥주 씨가 골드금고에서 인수대금에 해당하는 100억 원을 대출받지 못하자 골드금고 인수 계획이 흐트러지고 자금난에 시달렸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흥주 씨와의 매각협상이 실패한 뒤에 이용호 씨 쪽에서 다시 유신종 사장과 협상을 벌이는 등 골드금고 매각 논의는 물밑에서 꾸준히 진행됐다.
그렇다면 누가 골드금고 매각을 이렇게 집요하게 추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따른다. 검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유신종 씨를 상대로 집중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 전 사장은 전문경영인이었다. 하버드대를 나온 그는 경영난에 빠진 골드뱅크 사장으로 발탁됐다.
그렇다면 대주주의 낙점을 받은 그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골드금고 매각에 열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당시 골드금고의 경영에 대한 실세였을까. 김진호 전 사장은 물러날 당시에도 골드뱅크의 대주주는 아니었다.
눈여겨 볼 점은 검찰에서 유 전 사장이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의 지시를 받은 점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유 전 사장이 ‘회사 돈으로 김 전 사장의 지분을 사주라’는 김석기 씨의 지시를 받고 배임을 저질렀다며 그를 불구속 기소했었다. 적어도 유 전 사장이 골드뱅크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김석기 전 사장의 발언권이 통했다는 얘기다.
또 그와 함께 골드뱅크 이사진으로 오른 인물들도 의혹이다.
유신종 씨를 골드뱅크의 새 경영진으로 영입한 쪽에서는 대학교수인 김 아무개 씨도 등기이사로 영입했다. 김 교수는 99년 3월부터 금감원 감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금감원 감리위원이라는 자리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자리임에도 미국 국적인 김 교수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점이다. 더욱 이상한 점은 그가 이용호 게이트의 핵심인물인 김영준 씨의 도피에 개입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용호 게이트가 터진 2001년 9월 말 골드금고 이사직에서 사임했다.
누군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느 한 곳에서 골드금고 매각을 줄곧 지시했고 이를 두고 이용호 게이트의 세력과 김흥주 게이트의 세력, 관계-정계의 내로라 하는 세력들이 한데 어울려 돌아간 셈이다.
이번 검찰 수사가 DJ 정권 시절 벤처 거품을 둘러싼 작전 세력의 전모를 파헤칠 수 있을 지 주목되는 이유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