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경영 개입’ 우려, 시민단체 ‘관치’ 비판…독립기관 위탁 등 대안 제시에 국민연금 “여러 방안 검토”
#국민연금의 영향력
국민연금은 최근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대표적 사례로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안을 반대했다. 해당 합병안은 주주총회를 통과했지만 숙제가 남아있다.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매수청구권이란 회사가 합병 등 중대한 사안을 진행할 때 이를 반대하는 주주가 회사에 주식 매수를 청구할 권리를 뜻한다. SK이노베이션은 합병을 반대하는 주주의 주식을 주당 11만 1943원에 매입할 예정이다.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 주식 594만 1126주(지분율 6.21%)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이 SK이노베이션 주식 전량에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SK이노베이션은 국민연금에 6650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
두산그룹은 두산밥캣을 기존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에서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이전한 후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을 추진했다. 국민연금은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도 반대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두산그룹은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 계획을 철회하고,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두기로만 했다.
두산그룹도 국민연금의 주식매수청구권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개편을 반대하는 주주들의 주식을 주당 2만 850원에 매입할 계획이었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 주식 4447만 8941주(지분율 6.94%)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두산에너빌리티는 9274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두산에너빌리티는 주식매수청구권 한도로 6000억 원을 설정했다. 물론 이사회 협의를 통해 한도 이상의 돈을 지급할 수는 있다. 그러나 두산에너빌리티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지난 6월 말 별도 기준 4345억 원이다. 현실적으로 지급이 쉽지 않다.
기업 경영 활동에서 국민연금의 존재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국내 주식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 158조 7240억 원에 달한다. 국민연금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주주총회 안건을 반대한 횟수는 △2020년 535건 △2021년 549건 △2022년 803건 △2023년 692건 △2024년 1~3월 641건이다. 이는 전체 안건의 15~25%에 해당하는 비중이다. 경영권 같은 민감한 문제에 국민연금이 개입하기도 한다. 일례로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는 지난 3월 정관 변경을 요구하는 동시에 사외이사를 추천했지만 주주총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는 국민연금의 반대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금융위원회(금융위)는 지난 3월 스튜어드십코드 가이드라인에 ‘기관투자자는 투자대상회사가 회사 가치를 중장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시행하면서 시장 및 주주와 충실히 소통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이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계기가 될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대안은 뭐가 있을까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지난 5월 설문조사 결과 국내 기업의 57.1%가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고 밝혔다. 주주가치 제고효과가 미흡하고 대기업 견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현재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범위가 법·제도적으로 주주대표 소송이나 손해배상 소송까지 가능할 정도로 기업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며 “국민과 기업의 신뢰를 받는 공적기금으로 위상을 갖출 수 있도록 투명한 지배구조와 의사결정의 전문성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결정은 기업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인데 누구나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안건을 반대하는 이유도 두루뭉술하게 설명해 기업이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재계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여러 우려스러운 비합리적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수탁자 책임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관치로 격하됐다는 비판을 받는 등 기금운용의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와 시민단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안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에 의결권을 위탁하는 것이다. 이창민 한양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는 지난 8월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현황과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행동주의펀드에 자산을 위탁하고 국민연금이 유한책임사원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위탁운용사 선정 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질적 평가를 반영하는 등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20명은 △정부 인사 6명 △사용자 대표 3명 △근로자 대표 3명 △지역 가입자 대표 6명 △관계 전문가 2명으로 구성돼 있다. 정부 인사 6명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기획재정부 차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이 포함돼 있다. 정부가 의결권 행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 운용 지침 및 의결권 행사 지침을 결정한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국내 주식 중 약 80조 원은 위탁 운용을 맡겨 놓은 상태다. 전체 투자액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국민연금이 올해 1~3월 주주총회에서 반대한 안건 641건 중 309건은 위탁 운용사가 의결권을 위임받고 행사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주식매수청구권이 발생할 수 있는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위임하지 않고 직접 참여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의 ‘위탁 운용사 의결권 행사 위임 가이드라인’에 “주식매수청구권 발생 안건 및 중점 관리사안 등 수탁자책임 활동 중인 기업의 안건은 위임 범위에서 제외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위임이 어렵다면 자문 결과라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과정에서 여러 기관으로부터 자문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자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김명연 전 자유한국당 의원(현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은 2020년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 내용 공개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자동 폐기됐다.
국민연금이 쉐도우보팅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쉐도우보팅이란 의결 정족수만 채우고, 주주총회 안건 찬·반은 기계적으로 적용해 투표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주주총회 특별결의 안건은 주주 3분의 1 이상이 참석하고, 이 중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3분의 1 이상의 주주가 참석하지 않아 안건이 통과되지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찬·반 의결권으로만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활동은 법·제도적으로 기업 경영 개입이나 법적 소송까지 가능한 단계로 진입했고, 경영권 변경 추구도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실제 국민연금은 2019년 주주제안을 통해 한진칼과 남양유업의 정관 변경을 시도했다.
그러나 쉐도우보팅 방식이나 찬·반 의결권만 행사하는 방안은 지나치게 친기업·친시장 정책이라는 비판에 휩싸일 수 있다. 실제 일부 시민단체는 국민연금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 관계자는 “여러 개선 방안을 검토하고 논의하고 있지만 아직 세부적인 사안은 공개하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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