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처리됐는데 어찌된 일인지 자본시장의 ‘일진’인 증권사들은 ‘멘붕’이 됐다. 고대하던 투자은행(IB) 관련 내용이 쏙 빠진 채 껍데기만 통과됐기 때문이다. 결국 법 개정이 이뤄지기도 전인 지난해 말 일찌감치 증자를 해서 쌓아 놓은 3조 5000억여 원은 쓰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해야 할 처지다. ‘무법증자(無法增資)’의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지만 ‘절대 갑(甲)’인 금융당국에 따지지도 못할 처지다 보니 그저 속으로 억울함을 삭일 수밖에 없다. 물론 금융위는 법이 통과 안 된 것은 국회 탓, 증자를 한 것은 증권사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며 슬쩍 발을 빼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 5대 증권사들은 종합금융투자회사, 즉 투자은행(IB) 인가를 따기 위해 자기자본을 3조 원까지 늘렸다. 현행법에는 종합금융투자회사라는 명칭도, 3조 원이란 기준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당시 금융위가 만든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이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증권사들이 먼저 증자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당시 증자를 단행했던 증권사 임원 출신 인사는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이고 실물경제 상황도 좋지 않았는데 어느 회사가 자발적으로 증자를 하려고 했겠느냐”면서 “당시 금융위가 자본시장법 개정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속으로는 상당한 부담을 느꼈고 증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취임한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저축은행 사태 뒤처리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등으로 이렇다 할 ‘업적’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형 헤지펀드’와 ‘글로벌 IB’가 눈에 들어왔고 이에 ‘올인’했다. 진통 끝에 그 해 9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완성됐다. 개정안에는 종합금융투자회사, 즉 IB 인가 조건으로 자기자본 3조 원을 명시했다. 그런데 당시에 국내 증권사 가운데는 이 기준을 충족하는 곳은 없었다. 그때도 이미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국회통과 가능성이 낮았고, 증권사들의 수익도 뒷걸음치던 상황이다.
그런데 9월 20일 대우증권의 1조 1241억 원을 시작으로 10월 10일 삼성증권이 4502억 원(이후 4080억 원으로 수정), 10월 18일 현대증권이 5950억 원, 10월 21일 우리투자증권이 6707억 원(6360억 원으로 수정), 10월 27일 한국증권이 7300억 원의 증자를 결정했다. 회사별로 표현은 다르지만 개정될 자본시장법에서 종합금융투자업 인가를 받기 위한 것임을 이사회 의사록에 명기했다.
금융위는 침묵했지만, 당시 업계에서는 법안통과를 압박하려는 금융위의 입김이 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금융위의 수장인 김석동 위원장은 스스로 ‘관치의 화신’이라 인정할 정도로 강력한 정책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대주주들을 물론 일반 투자자 주머니에서 나온 총 3조 4931억 원(실제 증자액 기준)의 돈이 이들 5대 증권사의 자본금으로 쏟아 부어졌다.
그런데 증자의 조건이 됐던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를 거치며 대폭 손질됐고, 종합금융투자업 신설 부분은 아예 삭제됐다. 헤지펀드가 자본시장의 변동성을 이용해 시장을 교란시켜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투자은행 및 헤지펀드의 활성화를 위한 개정안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됐다고 한다. 또한 전체 증권사 평균 자기자본이 6789억 원 수준이어서 3조 원 규제는 중·소형사가 종합금융투자업 도입 혜택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받아들여졌다. ‘경제민주화’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현 정부 임기가 채 90여 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이 다시 추진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이번 법안 수정과정에서 IB 부분 등에 대한 민주당의 반대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내달 대선에서 야권 후보가 당선될 경우 여당이 될 민주당의 반대를 넘어 법안을 통과시키기는 더욱 어려울 수 있다.
늘어난 자본금 규모는 연 4%로 치면 이자만 매년 1397억 원에 달한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어떻든 최소한 은행이자보다는 수익을 더 내야 주주들에게 체면이 서는 게 당연하다. 그나마 올해는 채권금리가 하락세여서 채권운용에서 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내년에는 이마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더 이상 금리가 떨어지기 어렵다 보니 채권부문에서 수익을 기대하기도 녹록하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투자처를 찾자니 경기 상황이 워낙 어려워 마땅한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한 5대 증권사의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011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 4.96%로 업계 전체평균 5.26%를 밑돌았다. 2010회계연도에는 8.35%로 업계평균인 7.47%를 웃돌았었다. 2012회계연도 1분기(4~6월) 5대 증권사의 ROE 평균은 0.57%로 업계전체평균인 0.5%는 웃돌았지만, 절대수치가 급감했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2.3%로 은행이자의 절반 수준이다.
또 다른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자기자본을 다시 줄이고자 감자에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이 내년 이후에도 지속될까봐 매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증자를 한 5대 증권사 가운데 대우, 삼성, 현대, 세 증권사는 증자 후 경영실적 부진 등의 이유로 최고경영자가 교체됐다.
한편 자본시장법에서 IB부문이 제외됨으로써 한국형 헤지펀드도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헤지펀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라임브로커 역할을 하는 증권사가 투자자 유치 및 공동투자, 펀드운용 관련 자금지원 및 조사업무 등을 맡아야 하는데 IB 관련 법안이 없으면 현행 법규상 가능한 업무가 제한된다. 즉 한 쪽 팔과 다리에 족쇄가 묶이는 셈이다.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10대 IB들은 전세계 헤지펀드의 90% 이상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라임브로커이기도 하다.
업계 관계자는 “프라임브로커를 위한 IB 법안이 마련되지도 않았는데 헤지펀드를 출범시키고, 개정안으로 증자를 종용하는 것은 명백한 관치”라면서 “국익을 위한 관치라면이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몇몇 공무원의 성취욕을 충족하기 위해 업계가 동원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울분을 토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