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왼쪽),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기 전경련 회장직에 조석래 효성 회장이 유력해 보였다. 조 회장이 차기 회장으로 사실상 확정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올 정도로 회장단 내 의견이 수렴된 듯했다.
그런데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의 ‘70대 불가론’이 터져 나오면서 차기 회장 추대가 무산되고 말았다. 조 회장의 차기 전경련 회장 추대가 ‘확실’시되던 지난 2월 27일 정기총회 자리에서 단상에 앉은 회장단 구성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준용 회장이 “70세가 가까워 오면 전경련 회장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신임 회장 추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만 것이다. 회장단 만장일치가 아니면 새 회장 선임이 불가능한 전경련 정관에 따라 새 회장 추대는 추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전경련 회장단 구성원은 강신호 회장과 조건호 상근 부회장, 최근 새로 회장단에 합류한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을 포함해 총 22명이다. 70대 불가론을 제기한 이준용 회장은 193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70세다. 그밖에 70대 이상 인사로는 81세의 강신호 현 회장, 73세의 조석래 회장, 그리고 70세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있다. 현 회장인 강 회장과 그동안 전경련 행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정 회장을 제외하면 이 회장의 발언은 사실상 회장직 추대를 앞두고 있던 조 회장을 겨냥했던 셈이다.
이준용 회장의 돌출발언 배경을 두고 재계 인사들은 ‘라이벌 의식이 표출된 것’이란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이날 총회 직전까지 조 회장의 신임 회장직 취임이 확실시된 것은 여러 인사들의 조 회장에 대한 지지 때문이었다. 2월 27일 정기총회 직전 일부 회장단 구성원들이 몇 차례 회동을 통해 강 회장을 제외할 때 전경련 최고령자인 조 회장의 차기 회장 추대를 굳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신호 회장과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등이 조 회장 추대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강 회장이 연임 의지를 접으면서 차기 후보군으로 거론돼 온 인사들은 조 회장을 비롯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등이며 전경련 내 연장자군에 속하는 이준용 회장도 차기 회장 하마평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후보군 중 일부가 조 회장 지지로 돌아선 것이 알려지면서 건설부문 등에서 효성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온 대림의 이 회장이 딴죽을 걸었다는 평이 제기된다. 조 회장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인사가 막판에 이 회장 편에 서면서 이 회장의 총회장 발언을 부채질했다는 뒷이야기도 들려온다. 조 회장 추종세력은 조 회장에게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전경련 위상 재건’을 주문했다는 전언이다. 라이벌 그룹의 전경련 회장직을 통한 재계의 자리매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었던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번 파동으로 재벌그룹 간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알력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현 전경련 집행부인 강신호 회장이나 조건호 부회장은 재계에서 최대의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삼성그룹과 큰 틀에서 이견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한때 전경련 회장 후보 물망에 올랐던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전경련의 ‘개혁’을 주문하며 ‘부회장직’ 사표를 던졌다. 김 회장의 ‘사표’는 애초에 전경련에 먼저 냈지만 전경련에서 발표를 하지 않자 동부그룹 쪽에서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이 그의 사표가 불러올 ‘파장’을 염려했다면 김 회장은 사표를 통해 ‘개혁’을 요구한 셈이다.
4대 그룹에선 회장직을 고사하며 사업상 지장을 받지 않는 선에서 전경련을 ‘관리’하고 싶어하고 그 밑의 중견그룹에선 ‘힘있는 전경련’을 요구하고 있는 ‘이해상충’의 문제가 생기고 있는 셈이다.
이 ‘이해상충’은 기업들 간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린다.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70대 불가론’을 주창한 이준용 회장의 대림산업은 석유화학 분야에서 효성과 경쟁관계에 있다. 효성과 사업상 라이벌 관계에 있는 그룹으로는 코오롱그룹도 빼놓을 수 없다.
코오롱의 이웅렬 회장이 지난번 이건희 회장 주최의 만찬에서 한 발언도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때 이건희 회장이 ‘건강상 문제가 없으면 강신호 회장을 재추대하자’는 발언을 했을 때 강 회장이 ‘없다’고 하자 이웅렬 회장이 ‘연임 재청’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효성과 코오롱이 그간 사업상 앙금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웅렬 회장의 이런 발언도 ‘조석래 카드’보다는 ‘삼성 관리’하에 있지만 사업상 무색무취한 ‘강신호 카드’를 더 선호한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즉 겉으로 드러난 중견그룹의 ‘전경련 개혁 주문’의 총대는 김준기 회장이나 이준용 회장의 발언이 전부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각 그룹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회장 추대가 불투명해진 또 다른 배경으로 전경련 회장단을 감싸고 있는 경기고 동문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강신호 회장과 조건호 상근부회장을 제외한 20명의 회장단 인사들 중 절반인 10명이 경기고 출신이다. 비 경기고 출신인 4대 그룹 총수들이 전경련 행사에 소극적인 현 상황에서 전경련 운용에 미치는 경기고 출신인사들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2월 27일 총회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사이가 된 조석래 회장과 이준용 회장이 모두 경기고 출신이며 후보군으로 거론되던 김승연 현재현 회장 등도 경기고 동문이다.
경기고 출신 10명 중 이준용 회장을 비롯해 현재현 박영주 허영섭(녹십자) 이구택(포스코) 박용현 회장 등 6명은 경기고-서울대(KS) 선후배 사이다. 이들 중 박영주 회장은 조 회장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나머지 인사들 중 일부가 이 회장을 부추겼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결국 경기고 동문 중에서 KS라인과 비 KS라인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신임 회장 추대를 방해했다는 지적이다.
조 회장 카드 불발 이후 새 회장 후보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또한 간단치 않아 보인다. 후보군으로 거론돼 온 박삼구 회장에 대해선 업계 라이벌인 한진 조양호 회장 측의 경계가 예상되며 김승연 회장의 한화, 현재현 회장의 동양과 동종업계에서 경쟁하는 기업의 오너들 또한 전경련 회장단에 제법 포진돼 있는 까닭에서다. 삼성을 제외한 4대그룹 일각에선 ‘젊은 회장 옹립’에 대해서도 무방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효성그룹에선 최근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 ‘불편한 심경’을 내보이고 있어 새 회장 선출은 더욱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재 전경련은 차기 회장 추대 문제 외에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의 총수들이 전경련 모임 참석에 적극적이지 않아 재계를 대표한다는 전경련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김준기 동부 회장이 회장단 탈퇴 의사를 밝히는가 하면 전경련 회장단 영입 1순위로 거론돼 온 허창수 GS 회장이 전경련의 러브콜에 계속해서 손사래를 치고 있다. 체면이 말이 아닌 셈이다. 어느 때보다 강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때 선장을 구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전경련호가 언제쯤 닻을 올리고 순항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