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삼성 이건희장학재단의 이사들이 지난해 10월 13일 2차 임시이사회를 열었다. 세금을 내지 않는 공익재단의 이점을 그룹 지배구조 유지에 이용하는 재벌들이 많다. 연합뉴스 | ||
재벌가 공익재단의 비중이 커진 만큼 3월에 열린 각 기업 주주총회를 통해 총수일가 인사들이나 계열사들 못지않게 공익재단들 또한 막대한 배당금을 챙겼다.
주요 재벌들이 거느리고 있는 공익재단들 중 올 초 현금배당을 통해 가장 많은 돈을 챙긴 곳은 한진해운 계열인 재단법인 양현이다. 지난해 12월에 발족한 신생재단 양현은 아직까지 뚜렷한 공익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 11월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별세하면서 고 조 회장 명의 지분 출연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양현은 한진해운 지분 3.43%를 갖고 있다. 한진해운은 최근 보통주 1주당 1000원의 배당을 실시해 246만 주를 보유한 양현은 24억 6000만 원의 배당을 받게 됐다.
최고배당 수혜를 받은 공익재단인 양현은 향후 한진가 장남인 조양호 한진 회장과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 유족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 고 조 회장 미망인 최은영 씨와 자녀들이 상속받은 한진해운 지분은 총 4.59%이며 여기에 한진해운 자사주(4.64%)를 합하면 9.23%다. 반면 조양호 회장 측 기업인 대한항공(6.25%) 한국공항(4.33%) (주)한진(0.48%)의 한진해운 지분을 합하면 총 11.06%에 이른다.
지난해 한진가 형제들은 유산상속 문제로 법정다툼까지 벌인 바 있다. 장남인 조양호 회장과 삼남 고 조수호 회장이 한편이 돼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사남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의 연합과 맞서 앙금을 남겼다.
현재 고 조 회장 미망인 최은영 씨 측 우호지분이 조양호 회장 측 지분보다 적다. 그런데 재단법인 양현의 이사장직에 최 씨가 오르면서 양현의 3.43% 지분이 유사시 최 씨 측을 지지해줄 수 있게 됐다. 형제 간 유산 갈등 과정에서 조양호 회장과 고 조수호 회장은 ‘같은 편’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진해운 지분 관계를 볼 때 한진해운이 한진으로부터 아무런 잡음 없이 계열분리될 것이라 단정할 수만은 없다. 결국 양현의 존재가 고 조수호 회장 유족 측의 아슬아슬한 지분 우세를 보장해 만일의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진해운의 공익재단 다음으로 고액 배당 수혜를 받은 곳은 LG 계열 재단들이다. LG연암재단은 (주)LG 지분 2.13%와 LG상사 지분 0.04% 지분 보유를 통해 18억 5000만 원의 배당을 받았으며 LG연암문화재단은 (주)LG 지분 0.33%를 통해 2억 9000만 원의 배당을 받았다. 합계 21억 4000만 원의 현금이 LG 계열 재단들의 계좌로 입금된 것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LG연암재단의 (주)LG 지분 2.13%는 (주)LG 대주주 명부에 오른 총수일가 49명(두 개의 공익재단 포함) 중 일곱 번째로 높은 수치다. 구본무(10.51%) 구본능(5%) 구본준(7.58%) 구본식(4.46%) 총수일가 형제와 구본무 회장 부인 김영식 씨 (4.30%), 구본무 회장 양자인 구광모 씨(2.85%)만이 LG연암학원에 앞설 정도다. LG그룹 지주회사인 (주)LG가 전체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는 만큼 LG연암학원이 LG그룹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셈이다.
삼성그룹 계열 공익재단 중 올 초 현금배당의 수혜를 본 곳은 삼성복지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이다. 삼성의 공익재단들은 지난해 삼성이 8000억 원 사회환원을 발표하고 그 일환으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옛 삼성이건희장학재단)에 이건희 회장 막내딸인 고 이윤형 씨 유산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삼성 계열사 지분이 증여되면서 관심을 끌게 됐다. 삼성복지재단은 삼성전자로부터 4억 5000만 원, 삼성물산으로부터 8000만 원의 배당을 받았으며 삼성문화재단은 삼성전자로부터 1억 9000만 원, 삼성물산으로부터 4000만 원을 받았다. 두 재단이 수령한 금액은 총 7억 6000만 원에 이른다.
한진이나 LG 계열의 재단들보다 배당액은 적지만 삼성 소속 재단들은 그룹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금융계열사가 비금융계열사 지분을 5% 초과해서 가질 수 없다’는 금산법 개정안 시행을 앞둔 상태라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26% 중 2.26%를 처분해야 하며 이는 곧 그룹의 순환출자구조를 흔들 요인이 된다. 지분 증여에 따른 양도세가 부과되지 않는 공익재단들로의 지분 이전을 통해 이건희 회장 측이 삼성전자와 그룹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SK그룹은 한국고등교육재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재단은 SK케미칼 지분 1.16%와 SKC 0.62%를 갖고 있다. 두 기업 지분 보유를 통해 재단은 1억 2000만 원의 배당을 받았다. SKC와 SK케미칼은 최태원 회장의 사촌인 최신원-최창원 형제가 이끌고 있으며 지분 문제가 해결되면 SK그룹에서 분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이 보유한 SKC와 SK케미칼 지분의 향배 또한 관심거리가 될 전망이다.
롯데그룹이 지닌 공익재단이 이번 현금배당으로 수령한 총액은 5억 원이다. 롯데장학재단은 롯데칠성음료 지분 6.28%, 롯데제과 지분 6.81%를 보유하고 있다. 재벌그룹 계열 공익재단들 중 계열사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경우를 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롯데장학재단이 해당 계열사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재벌가 소속 공익재단들에 비해 높은 셈이다.
그룹 지배구조와 관련해 한화 계열인 천안북일학원도 최근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어머니인 강태영 씨가 지난해 10월 자신 명의 (주)한화 지분 108만 주 전량을 천안북일학원에 증여해 학원의 (주)한화 지분을 1.82%까지 끌어올렸다. 종전까지 천안북일학원의 (주)한화 지분은 29만 주에 불과했다. 김 회장 어머니가 양도세가 발생하지 않는 공익재단으로의 증여를 통해 김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의 지분율을 높여 결국 김 회장의 의결권을 높여준 결과를 낳았다. 천안북일학원은 (주)한화로부터 1억 3000만 원, 한화석유화학으로부터 4억 8000만 원을 배당받아 합계 6억 1000만 원의 가욋돈을 챙기게 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고 박성용 명예회장 시절부터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대표적인 공익재단으로 자리잡아왔다. 이 재단은 그룹의 양대 지주회사인 금호산업과 금호석유화학 지분 보유를 통해 1억 4000만 원의 현금배당을 받았다.
고 박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금호아시아나 총수일가의 장손인 박재영 씨가 현재 예술 관련 공부를 하고 있어 문화재단을 물려받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박재영 씨를 제외한 나머지 총수일가의 주요 계열사 지분이 조금씩 늘어나는 동시에 문화재단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도 증가해 장손이 문화재단을 맡는 대신 경영엔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에선 재단법인 영문이 현대상선 지분 162만 주를 보유해 현금배당 8억 1000만 원을 받았다. 현 회장 부친인 고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지난해 11월 별세하기 전 자신 명의 지분을 증여해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2005년 설립된 재단법인 영문은 아직까지 뚜렷한 공익사업 실적이 없다. 별도의 증여세 없이 고 현 전 회장 지분이 상속된 것을 두고 범 현대가와 두 번의 경영권 전쟁을 치른 현정은 회장 일가의 지분 승계 수단으로 재단법인 영문이 활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재단법인 영문의 이사장이 현 회장의 어머니 김문희 용문재단 이사장인 것을 두고 범 현대가 안팎에 나도는 ‘정 씨가 아닌 현 씨의 현대그룹’ 논란의 빌미가 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CJ그룹에선 CJ나눔재단과 CJ문화재단이 현금배당의 수혜를 받았다. 지난해 12월에 CJ나눔재단이 (주)CJ 지분을 늘리고 CJ문화재단이 CJ(주) 대주주 명부에 처음 이름을 올리면서 배당액을 늘릴 수 있었다. CJ나눔재단은 CJ(주) 우선주 1.36%를 통해 1억 3000만 원을, CJ문화재단은 CJ(주) 우선주 0.35% 보유로 3000만 원을 배당받게 됐다. CJ(주)를 지주회사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한 지배구조 변화를 추진 중인 CJ그룹의 행보와 이재현 그룹 회장이 이사장인 두 재단의 CJ(주) 지분 증가가 비슷한 시점에 이뤄져 두 재단의 지분 매입은 상속세 없는 증여를 위한 수단이란 평을 일각에서 듣기도 한다. 그러나 두 재단이 보유한 지분이 의결권 없는 우선주란 점에서 지배권 세습을 위한 증여 수단으로 보기에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