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왼쪽)과 아들 이재용 전무. | ||
하지만 재계 호사가들 사이에선 이번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기념 행사가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승계’를 위한 세리머니로 활용될 가능성이 더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대관식을 미뤄온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에 대한 공식적인 후계 선언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삼성그룹이 업계의 관측대로 금년 말 이재용 전무의 승계를 위한 공식행사를 치르려면 그 전에 재산 사전 승계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을 어느 정도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의혹 사건과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 시행을 둘러싼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에버랜드 재판의 결과는 이 전무가 그룹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에버랜드 지분 취득과정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금산법 개정안에 따른 계열사 지분 처분 문제 또한 이 전무와 삼성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삼성이 올해 이 회장 취임 20주년 행사에서 이재용 전무의 거취에 관한 공식 선언을 하기 위해선 앞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올해 안에 내놓아야 한다. 이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시점을 저울질하는 삼성 측이 에버랜드 건과 금산법 개정안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업계 인사들은 삼성 측이 차기 대선과 총선 등 굵직한 정치일정에 큰 기대를 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에버랜드 항소심이 장기화 국면에 빠져들었지만 올 1월 중 항소심 선고공판이 예정됐던 것을 감안해보면 늦어도 올 해 안에 결말이 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삼성 측의 기대대로 무죄 판결이 나온다면 검찰 측이 즉각 항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죄판결은 반 삼성 정서를 어느 정도 희석시킬 구실이 된다. 이재용 전무의 에버랜드 지분 취득 과정의 정당성도 확보될 수 있다. 물론 일부 정치권 인사들과 시민단체의 반대여론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올 하반기에 접어들면 대선 열기에 휩싸여 에버랜드 재판 결과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크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삼성 측 인사들의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삼성 측 인사들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를 상정해도 삼성 측에 그리 큰 피해는 닥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 박노빈 씨는 1심에서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근 항소심 재판장 회의를 통해 법원 측이 1심 파기율 축소를 결의했지만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이 1심보다 높은 형량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만약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접어든 올 하반기쯤 삼성 측 인사들이 1심과 마찬가지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게 된다면 대법원 상고 포기의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두산그룹 박용성-박용만 총수형제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해 결국 이듬해 특별 사면을 받은 것처럼 삼성 측도 내년 2월 새 정부 출범에 따른 특사를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다.
에버랜드 재판 외에 삼성의 후계 작업을 옥죌 만한 고민거리는 금산법 개정안 시행일 것이다. ‘금융계열사와 비금융계열사가 상호 지분 5%를 초과해서 보유할 수 없다’는 금산법 개정안 국회 통과에 따라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식의 순환출자구조를 이루고 있는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런 까닭에서 그동안 삼성 측이 계열사 간 지분 정리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업계 인사들의 분석이 각양각색으로 쏟아져 나온 바 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삼성 측엔 별다른 지분구조 관련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금산법 개정안 적용 대상인 삼성의 금융계열사들은 최근 급물살을 타는 생보사 상장 논의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하다. 삼성생명이 상장될 경우 삼성그룹은 골칫거리 중 하나인 삼성자동차 채권단의 소송 건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금산법 개정안에 대비한 지분 조정문제를 소홀히 다룬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삼성 측 분위기에 대해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이 금산법 개정안 폐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정치권을 출입하는 정보 수집 담당자들 사이에선 ‘금산법 개정안을 주도해온 정치인들이 대부분 비례대표라 내년 4월 총선 출마와 당선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 삼성의 자신감을 높여준다’는 분석이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다른 재벌그룹과 달리 삼성 측이 정보팀을 확대하지 않는 점 또한 관심거리다.
일부 정·재계 인사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삼성 계열사들의 내부 인사에서 찾기도 한다. 최근 들어 삼성의 금융 계열사들은 정보팀 대신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담당 부서에 대한 인적 보강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단기적으로는 업계 정책을 주관하는 공정위와 교감의 폭을 넓히면서 금융당국의 정서를 살피고 장기적으로 정치권 동향을 보며 금산법 개정안 폐기에 무게를 둘 것이란 관측이 확산되는 것이다.
2008년 4월부터 개정 시행되는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금융계열사는 다른 계열사 지분 15%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삼성카드가 지닌 삼성에버랜드 지분(25.4%)이 걸림돌이 된다. 삼성 측이 공정위와의 관계에 공을 들이려는 까닭으로 풀이된다. 금산법 개정안의 시행이 2009년 3월부터인데 만약 폐기될 경우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초과 지분에 대해선 공정거래법만이 적용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업계 인사들은 ‘삼성이 금산법보다 공정거래법에 더 신경을 쓸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