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명문대 박사 출신인 정 아무개 씨는 지난 1991년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입사해 국내외에서 수십 개의 특허를 출원했다. 특히 정 씨가 발명한 HDTV 영상 및 소리 압축 특허는 국제 표준 기술로 사용되면서 삼성전자의 수익창출에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정 씨는 당시 삼성전자의 최고 보상금액이 3억 원이라고 규정돼 있던 직무발명보상지침에 따라 2억 2000만 원의 보상금만 지급받은 채 퇴사했다.
정 씨는 회사를 떠났지만 삼성전자는 그가 개발한 특허를 이용해 승승장구했다. 지난 2004년부터 본격적인 매출을 기록하더니 625억 원의 로열티 수익을 올리는 성과를 거둔 것. 그러나 정 씨에게 추가로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이에 정 씨는 지난 2010년 삼성전자를 상대로 “해당 특허에 대한 기여도가 30%에 이르므로 발명보상금 185억 원을 지불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날벼락을 맞은 삼성전자는 “보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도 지났고 2002년 보상금을 지급할 때 추가적인 보상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부장 김현석)는 정 씨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달 29일 재판부는 “정 씨가 영상 압축 원천 기술에 관한 창의적인 발상으로 특허 발명을 주도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삼성전자는 정 씨에게 60억 원을 지불하라”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삼성전자가 주장했던 합의 부분도 “증거가 부족하고 삼성전자가 정 씨에게 특허 발명으로 인한 구체적인 수익금을 알려준 사실이 없는 점 등에 비춰 실제 합의가 있었더라도 무효 또는 취소될 수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삼성전자는 “법원의 결정은 직원의 발명과 관련된 회사의 기여도를 과소평가한 것”이라며 “향후 판결문을 면밀히 분석해 항소 여부를 포함한 대응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다.
이번 판결은 직격탄을 맞은 삼성전자뿐 아니라 전자·IT업계 전반을 흔들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직무발명보상제도에 따른 사측과 연구원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 같은 거액의 보상 판결이 내려진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직무발명보상제도란 직무와 관련된 발명으로 이익이 발생할 경우 그중 일부를 해당 근로자에게 보상해 주는 제도다. 만약 항소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유사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 회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일요신문 DB |
또한 1심 판결을 뒤엎고 삼성전자의 승리로 끝난다 하더라도 업계의 시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송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는데 본래 직무발명보상 규정은 각 회사마다 기밀사안으로 취급해왔다. 보상이라는 이름 아래 적게는 몇 만 원에서 많게는 억 단위의 금액이 거래되는 만큼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 물론 연구원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수준에서는 알려진 바가 있으나 인력유출 및 과다경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상 규모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인해 삼성전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상금액을 공개하는 꼴이 됐다. 문제는 예상보다 금액이 컸다는 것. 삼성전자도 “임직원들의 발명 특허 장려를 위해 10여 년간 연 평균 50억 원가량의 보상금을 지급했다”며 연구원들에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보상금 규모는 특허청에서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특허청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보상 규모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특허로 인한 이익이 50억 원 미만일 경우에는 연구원에게 3~5%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50억 원 이상일 경우에는 최고 10%까지 지급하고 있었다”며 “각 회사의 보상금은 특허청에서 자료를 요청해도 공개하지 않는 사안이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이번에 생각보다 높은 금액임을 알려 이래저래 업계에서 상당히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다”고 말했다.
실제 현직 연구원들을 만나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면서도 판결 결과보다는 삼성전자의 보상금에 더욱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IT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한 연구원은 “삼성전자 판결 보도를 접하고는 삼삼오오 모여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눴다. 이번 사건으로 연구원의 노력이 좀 더 인정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우스갯소리로 왜 연구원들이 기를 쓰고 삼성으로 가려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말도 떠돌았다”고 전했다.
특히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연구원도 이번 판결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한다. 앞서의 연구원은 “국내 기업의 외국인 연구인 비율도 상당하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르나 어떤 회사에 소속돼 있으면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라도 이익에 대한 보상금을 받는 구조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삼성전자 판결에 따라 연구원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신기해하면서 자신들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다”고 말했다.
특허전문 권오갑 변호사는 “외국인의 경우 고용 당시 계약서에 따라 보상금이 지급되겠지만 현재 직무발명보상제도에 따르면 이번 경우처럼 소송을 제기해도 법적으로는 제한이 없다. 다만 발명 기여도가 아이디어 수준이 아닌 구체화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만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