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 ||
금융권을 시발점으로 일파만파 번져가는 기아자동차 위기설에 대해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정 회장은 지난 4월 25일 체코 오스트라바시(市) 인근 노소비체에서 열린 현대차 체코공장 기공식이 끝난 뒤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기아차 위기설에 대해) 보고는 받았는데,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언론의 질문에 정 회장이 답한 형태이긴 하지만 해외 출장 중인 정 회장이 기아차 위기설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이 화제가 될 정도로 기아차 위기설은 재계 전반을 달구고 있다. 특히 금융권에서 기아차 위기설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아차의 신용과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이라 위기설의 무게감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국내 2위 재벌인 현대차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기아차가 어쩌다 이런 소문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일까.
얼마 전 한 정보기관에 기아차 위기 상황에 대한 첩보가 입수돼 이를 정리 분석한 보고서가 청와대에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정·관·재계에 널리 퍼진 바 있다. 보고서엔 ‘기아차 경영상황이 악화돼 주거래은행에서 여신을 축소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다른 정보기관 보고서엔 기아차의 상황이 더 비관적으로 묘사돼 있다는 전언이다. 해외 영업실적을 부풀린 의혹이 있다거나 금융권이 여신을 해주기 어려울 정도라는 극단적 표현도 담겨있다고 한다.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몇몇 재계 인사들은 “(사정기관의) 정보 수집 담당자들이 상부에 보고서를 올리면서 극적으로 각색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아차에 대한 위기감이 널리 퍼져있다는 방증”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단 재무제표 수치만 보면 기아차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보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기아차 매출액은 17조 4400억 원으로 2005년 16조 원보다 늘었다. 그러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390억 원을 기록해 2005년 6800억 원에서 1년 새 무려 94%나 감소했다. 영업이익을 보면 더 심각하다. 2005년 740억 원 흑자였던 것이 지난해 1250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분기별로 따져도 기아차 영업손익은 4분기 연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증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4월 2일 한미 FTA 타결 소식에 힘입어 반짝 상승해 종가 1만 3400원을 기록했던 기아차 주가는 4월 13일부터 25일까지 단 하루도 하락을 피하지 못했다. 4월 26일에 이르러서야 ‘13일간의 하락’ 악몽을 잠시 피하는 듯했지만 결국 다시 떨어져 5월 3일 종가 기준 1만 1500원을 기록했다.
업계를 달구는 위기설에 대해 기아차는 지난 5월 4일 기업설명회를 통해 반박하고 나섰다. 기아차 안희봉 재경본부장(전무)은 “순수 가용 현금을 5000억 원 이상 유지하고 있다”며 자산 유동성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기아차 영업손익이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것에 대해서도 기아차 CEO인 조남홍 사장이 “쏘렌토 라인 조정으로 인한 생산 차질과 경쟁 격화에 따른 판촉비 증가 등이 원인”이라며 “신차 출시와 원가 절감 등을 통해 2분기부터는 흑자를 기록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기아차 임원들이 직접 위기설 진화에 나섰지만 2분기 실적 개선이 발표되기 전까진 위기설이 좀처럼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한편 기아차 위기설이 나돌게 된 배경을 정치권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각 정보기관과 대기업 정보수집 담당자들이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에 온통 몰려있는 터라 기아차 위기설 같은 매력적인(?) 정보가 정치권 주변에서 확대재생산될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아차 위기설을 지난해 현대차 비자금 사태와 연결해서 보는 시각도 있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으로 정몽구 회장이 구속수감되는 과정에서 현대차의 비자금 용처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결국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었다. 당시 호사가들 사이에선 ‘정 회장이 정치권과의 역학관계를 고려해 입을 다물고 구속수감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일각에선 ‘실세 정치인들이 정 회장에게 모종의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현대차 비자금 사태와 정 회장 구속수감의 배경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이 총수일가의 글로비스 지분 등을 출연해 1조 원 사회환원을 약속했을 때 정치권 일각에선 ‘일부 실세 정치인들이 정 회장 측에게 글로비스가 아닌 기아차를 토해내라고 종용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이어지고 있는 정치권발 기아차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어떤 신호인지 해석에 분주하기도 하다. 기업이 한번 정계나 관계에 덜미를 잡히면 결국 해당기업에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IMF 때 부도난 A 그룹의 경우 2세 총수가 경영권 확보 과정에서 정계와 법조계의 ‘손을 빌렸다가’ 결국 회사 부실의 원인이 됐고 금융그룹인 B 사는 회사 지분의 상당 부분이 엉뚱하게도 정보기관 출신 정치인 C 씨의 명의를 거쳐 모기업에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도 1대 주주의 지분이 불안정해 오너 일가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기아차 위기설을 정 회장의 불운(?)과 연결지어 보는 시각도 있다. 회삿돈 286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지난해 집행유예 판결에 이어 올 초 특별사면을 받았다. 지난해 구속수감에 이어 올 초 1심에서 실형(징역 3년)을 선고받은 정 회장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선 기아차 위기설이 자꾸 퍼져나가는 것과 정 회장에 대한 형평성 논란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도 한다. 괘씸죄(?)에 걸려든 재벌총수를 향한 정치권의 압박이 금융권과 증시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적인 시각인 셈이다.
기아차 측이 공언한 대로 2분기부터 가동률이 향상되고 수출이 본격화돼 영업손익이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면 현재 난무하는 소문들 또한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기아차 임원진의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할 적자 행진이 계속된다면 기아차 위기설을 둘러싼 정·관·재계발 음모론적 소문은 더욱 무성해질 것으로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