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그룹의 여행업 진출을 둘러싸고 대북사업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신동빈 롯데 부회장. | ||
롯데의 여행업 진출로 재벌가의 집안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신격호 롯데 회장 여동생의 남편인 김기병 회장의 롯데관광개발과의 일전도 불가피해진 것이다. 롯데관광개발은 지분관계상 롯데그룹과 별도의 기업이지만 이들이 친인척 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치권 일각에선 롯데의 여행업 진출이 대북사업 구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까지 거론되기도 한다. 재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화젯거리가 된 롯데의 여행업 진출 파장을 추적해 본다.
롯데그룹의 여행업 진출 선언 직후 한국관광협회중앙회는 롯데그룹 회장 비서실에 서한을 보내 ‘중소업체들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을 때까지 롯데의 여행업을 유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관광회사들 모임인 한국일반여행업협회도 ‘롯데그룹의 여행업 진출은 대기업의 횡포로 비칠 수 있다’며 여행업 진출 유보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중소업체들이 롯데의 여행업 진출에 ‘식겁’하고 나선 것은 롯데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인한 덤핑 경쟁 우려 때문이다. 롯데는 일본 최대여행사인 JTB와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여행업에 본격 진출하게 되는데 한일 양국의 큰손들이 국내 여행시장 장악을 위해 저가 상품을 쏟아낼 경우 중소업체들은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에 대해 롯데 관계자는 “여행업 시장은 제로섬이 아니고 (롯데가) 새로운 시장을 발굴해 파이를 키울 수도 있다”며 업계의 우려를 반박하고 있다. 롯데 측은 “한진 같은 대기업도 이미 관광업에 진출해 있다. 우린 아직 그런 대형업체들을 따라갈 정도도 안 되는데 (중소업체들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중소업체들은 롯데-JTB 합작 여행사업이 국내 항공사들마저 위협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일본 항공사의 빈 좌석이 헐값에 팔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롯데 측은 이에 대해 ‘국내 항공사들의 경쟁력을 폄하하는 시각’이라 맞받아치고 있다.
롯데 측의 해명에도 업계 인사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업계엔 ‘롯데가 여행업 전문가들을 억대 연봉으로 무차별 영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롯데의 여행업 진출이 중소업체들의 시장 점유율뿐만 아니라 인재풀마저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롯데 측은 ‘사실무근’이라 밝히고 있지만 7월 본격 영업 개시를 앞둔 롯데-JTB 측이 기존 업계 전문가들을 상대로 거액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좀처럼 끊이지 않고 있다.
롯데는 다른 업종 진출과정에서 이미 비슷한 진통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 롯데가 우리홈쇼핑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기존 업체들이 ‘롯데의 홈쇼핑 진출 반대’ 공동 행보를 보여 롯데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유통업계 공룡으로 자리 잡은 롯데의 홈쇼핑 시장 진출로 시장질서가 혼탁해질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롯데는 우리홈쇼핑을 인수해 롯데홈쇼핑으로 새 단장해 공격적 경영에 나섰지만 2대 주주인 태광 측과 경영권 관련 마찰을 빚어야 했다. 홈쇼핑 경우처럼 이번 여행업 진출과정에서도 누군가 롯데 측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롯데는 일본계 자본과 인력을 등에 업고 국내에 진출해 성공한 게 많다. 제과도 그렇고, 호텔도 그런 경우. 최근에는 중저가 의류(무인양품 등)나 뮤지컬 시장(시키)에 진입하면서 일본 기술과 인력을 등에 업고 진출해 시장에 안착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관련업계의 반발을 샀지만 롯데는 결국 ‘해냈다’.
그래서인지 신격호 롯데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희 씨의 남편 김기병 회장의 롯데관광개발이 얼마 전 농협과의 제휴를 통해 관광사업 확장에 나선 것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롯데 측이 일본 최대여행사인 JTB와의 합작을 통한 여행업 진출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롯데관광은 국내 최대 수준의 유통 판매망을 갖고 있는 농협과의 제휴를 선언했다. 이미 면세점 업계에서 롯데면세점과 동화면세점의 대결구도를 그려온 양측이 거대 자본과의 합작을 통해 여행업계에서의 집안싸움을 한바탕 치를 태세다.
롯데그룹의 여행업 진출이 롯데관광개발의 사업 영역과 충돌하기 때문인지 이를 현재 현대그룹이 독점하고 있는 대북 관광사업과 관련지어 보는 시각도 있다. 북측이 지난해 롯데관광을 염두에 둔 대북 관광사업 파트너 교체를 언급했던 것과 맞물려 ‘롯데 측이 대북 관광사업에 관심을 갖고 여행업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은 대북관계에 밝은 정치권 인사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고 있다.
북측의 대북 관광사업 주체 변경 요구 배경엔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보다 신격호 회장의 롯데그룹이 훨씬 더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을 것이란 북측의 관심이 깔렸을 것으로 해석된다. 롯데관광개발이 롯데그룹과는 별개의 기업이지만 북측에선 롯데가를 대표하는 신격호 회장의 범 롯데가에 대한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을 것이란 이야기다.
신 회장의 롯데그룹이 국내에서 여행 관광업체로서 자리 잡게 될 경우 북측이 군침을 흘릴 파트너로 급부상할 수 있다. 북측이 언제 또 다시 대북 관광사업 파트너 교체 요구를 할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한 해석이다.
롯데는 이미 10년 전부터 대북사업에 관심을 보여 왔다. 롯데는 지난 1997년 북측으로부터 초코파이 공장 설립에 필요한 정식 상표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당시 롯데의 공장 설립은 1998년에 이뤄질 것이란 시각이 팽배했었으나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당시 한국 경제를 강타했던 IMF 외환위기와 북한 내 사회간접자본 부족 등의 이유가 겹치면서 지금껏 현실화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 측에 따르면 북측이 허가한 상표 등록은 아직 유효하다고 한다.
대북 관계에 밝은 몇몇 정치권 인사는 “북측이 롯데의 자금동원력은 물론 일본 소비자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롯데의 현지 사업망에 큰 매력을 느낀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롯데가 이번 여행사업을 일본 최대여행사 JTB와 함께 벌이는 것 또한 대북사업 노림수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시각에 대해 롯데 측 인사는 “대북사업은 그룹 내에서 전혀 검토된 바 없다”며 사실무근임을 강조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