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지 24년 된 옛 나산백화점은 지난 1983년 영동학원에 의해 ‘영동백화점’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가 1994년 나산그룹에 인수돼 이름이 바뀐 곳이다.
영동백화점은 93년 1월 문을 닫았고 신세계 백화점이 위탁경영에 나섰다. 하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한 채 이듬해인 94년 당시 급성장 중이던 나산그룹에 인수됐다.
나산백화점으로 다시 선보인 이곳은 특유의 ‘가격파괴’ 전략으로 유통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하지만 백화점의 인기는 이내 시들해졌고 위기에 빠진 나산 측은 97년 이곳을 ‘나산 홈플레이스’로 재개관했다. 국내 최초의 홈인테리어가정용품 전문점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IMF 사태를 맞았다.
이처럼 나산 그룹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하며 지금까지 10년째 비어 있는 나산백화점과 이 건물 뒤편의 ‘나산홈플레이스 주차장’이 한데 묶여 조만간 새 주인을 찾을 예정이다. 곧 서울중앙지법에 의해 일괄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산백화점이 경매시장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98년 8월과 2003년 10월에도 경매에 부쳐진 적이 있지만 백화점 등기부등본상 채권액만 1600억 원이 넘는 등 권리관계가 복잡해 그동안 인수자가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인 이번에는 상황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다. 경매에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개입하면서 진행 과정이 예전과 달리 진통을 겪고 있다. 이번 경매는 당초 지난 4월 26일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경매신청자가 일부 조건을 변경하며 1개월간 경매가 미뤄졌고, 5월 31일 진행되기로 했던 경매도 기일 변경신청이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무기한 연기됐다.
특히 경매가 연기되는 과정에서 옛 나산그룹의 오너였던 안병균 전 회장이 등장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지난 4일 경매신청권자인 아이월드터미널은 이 백화점 물건의 1%가량 되는 지분에 대해 경매를 취하했다. 아이월드터미널이 이 지분에 대해 경매를 취하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4000평이 넘는 건물 중 40평 정도만 빼고 경매를 진행해달라는 희한한 요청을 한 셈이다. 그런데 흥미를 끄는 것은 경매가 취하된 1%의 지분을 갖고 있던 ‘부림비엠’이라는 회사의 실체다. 부림비엠은 안병균 전 회장의 부인 박순희씨와 안 전회장의 장남이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림비엠의 ‘1%’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만약 부림비엠이 이 지분을 계속 보유한다면 경매가 진행되더라도 낙찰가에 이 물건을 먼저 살 수 있는 권리인 ‘공유자 우선매수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경매절차가 당초 부림비엠의 지분을 포함한 상태로 진행되다가 이 지분을 뺀 방식으로 변경됐기 때문에 안 회장 측이 공유자 우선매수권을 쓸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렇게 되자 나산백화점 채권자 측에서는 “도덕적 해이”, “신종 알박기”라며 강력히 비난하며 경매연기를 법원에 요청했다.
이들은 보정서에서 “나산백화점의 일부 지분이 빠진 채 경매로 팔릴 경우 해당 지분을 가진 소유자가 공유자 우선매수권을 갖게돼, 물건 가치가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매각조건 변경’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후 매각경매 기일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만일 채권자 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나산백화점 및 백화점 건물 전체를 포함한 이 물건은 일괄매각 방식으로 경매에 부쳐진다. 1%를 갖고 나머지 99%를 사들이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하는 셈이다.
안 전 회장 측은 이런 상황을 파악했는지 막판에 이 1%의 지분을 부동산 개발업체에 팔았다. 그는 채권자 측에 “이번 경매에는 부림비엠이나 내가 간여하지 않을 것”이며 “옛 나산백화점을 되살 여력도, 그럴 의사도 없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