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6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 다짐 간담회에 참석한 박용성 IOC 위원이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버랜드 사건이 유죄가 되면서 이건희 회장 소환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번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삼성 인사들은 내심 무죄판결의 그림을 그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지라 삼성 측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건희-이재용 총수부자의 경영권 승계 근간이 되는 삼성에버랜드 지분 취득과정은 항소심 유죄 판결로 인해 여전히 시민단체 등의 표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에버랜드를 중심축으로 하는 그룹 지배구조 또한 다시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2심 판결 이후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부분은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검찰의 직접 조사 여부다. 삼성 측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선고 형량이 1심보다 더 무거워지면서 힘을 받게 된 검찰을 향해 ‘이건희 회장 소환’에 대한 요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삼성 측 인사들은 과연 어떤 대응책을 떠올리고 있을까.
우선 검찰의 보강 수사 가능성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법원까지 갈 경우 삼성 변호인단은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논리 개발에 주력할 것이므로 검찰 역시 이에 맞설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삼성은 검찰 공소사실(970억 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89억 원에 대해서만 유죄가 선고된 점과 그룹 차원의 공모 사실이 재판에서 다뤄지지 않은 점을 들어 대법원 무죄 판결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항소심을 통해 ‘삼성그룹 차원에서 지배권 이전을 위해 치밀한 기획 하에 전환사채를 발행했다’는 오명을 벗었다고 자평하는 것. 이재용 전무가 에버랜드 지분 취득을 통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토대를 다진 것에 대한 논란을 이번 판결을 통해 잠재울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그룹 지배구조를 비판해온 정치권과 시민단체 인사들이 검찰의 추가 수사를 요구하고 나설 수도 있다. 법조계 인사들은 ‘검찰이 할 수 있는 수사는 거의 다 했다’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항소심 판결 이후로 미뤄졌던 이 회장 소환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은 이미 이학수 부회장을 비롯해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홍석현 전 주미대사 등을 불러 조사한 바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과 관련해 검찰 포토라인에 서지 않은 핵심 인사는 이제 이건희-이재용 부자밖에 없는 셈이다.
항소심 판결 내용은 검찰의 추가 수사 의지를 북돋아줄 수도 있다.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은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30억 원을 선고받았다.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전 에버랜드 대표)에겐 1심과 같은 형량이지만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던 박노빈 에버랜드 사장은 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 지난 2월 15일 동계올림픽 실사단과 함께한 이건희 회장(가운데). | ||
그러나 문제는 여론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녀온 시민단체 등이 검찰의 보강 수사를 요구할 수 있으며 대선 정국에 접어든 정치권엔 반 삼성 정서로 무장해온 인사들 중심의 에버랜드 건 공론화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 회장과 삼성 입장에선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시점까지 안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인 셈이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2년 전 이 회장의 도피성 외유 논란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지난 2005년 9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이 회장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구설수를 낳았다.
때마침 이 회장이 마음껏(?) 외유를 할 수 있는 토대도 마련돼 있다. IOC위원인 이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외교활동 목적으로 외국행 비행기에 자주 오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일은 7월 4일이다. 만에 하나 수사당국이 7월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소환 카드를 꺼내들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서일까. 최근 재계에선 이 회장과 삼성이 평창 동계올림픽 못지않게 여수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에 적극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가 협조를 요청한 국제행사 유치활동에 나서는 이 회장을 소환하는 것이 수사당국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여수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일은 11월 27일이다. 만약 이 회장이 재계를 대표하는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활동 인사로 자리 잡는다면 청와대는 물론 전경련을 필두로 한 재계의 측면 지원까지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난 5월 29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이 회장과 삼성에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회장단은 평창 동계올림픽과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한 재계의 적극 지원활동을 결의했다. 당초 이날의 회의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에 주안점을 두려 했으나 준비과정에서 여수 세계박람회 건이 동계올림픽 사안과 같은 무게로 격상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지난 29일 전경련 회의에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점심까지 대접하며 세계박람회 유치를 역설했다. 정 회장 또한 현대차 비자금 사건으로 항소심 재판을 받는 처지다. 이를 두고 일부 호사가들은 “이건희 회장이 정몽구 회장과 여수 박람회 유치의 재계 리더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란 관전평을 내놓기도 한다.
이 회장이 여수 박람회 유치활동에 올인할 것으로 보는 시각의 배경엔 정치일정과의 관계도 깔려있다. 11월 27일 세계박람회 개최지가 결정되고 나면 곧바로 12월 대선을 맞게 된다. 어느 쪽이 집권하든 내년 2월 새 정부 출범을 전후로 경제인들에 대한 대규모 사면이 이뤄질 것이다. 삼성은 3심 항소로 직접 사면대상엔 포함될 수 없지만 친 재벌 분위기 조성을 기대해 봄직하다. 일단 11월 27일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일까지만 소나기를 피해보자는 것이 삼성과 이 회장의 심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