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정몽구, 정몽준, 정몽규 | ||
지난 10일 현대오일뱅크 최대주주인 아랍에미리트의 국제석유투자회사(IPIC)가 현대중공업에 지분 인수를 제안한 사실이 알려졌다. IPIC의 보유지분 70% 중 절반인 35%를 사가라는 것. 현대중공업은 이미 현대오일뱅크 지분 19.8%를 쥔 2대주주. 여기에 35%를 더 확보하면 54.8%가 돼 최대주주가 돼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 매각 당시 범 현대가가 되살 경우 우선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협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중공업으로선 정유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있고 2조 원 가까운 ‘실탄’도 보유하고 있어 가격만 맞으면 오일뱅크 되찾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14일 현재까지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검토 중이다”라고만 밝히고 있다.
게다가 현대오일뱅크는 2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이외에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현대자동차(4.35%) 현대제철(2.21%)과 정세영 명예회장의 아들 정몽규 회장의 현대산업개발(1.35%) 등이 주요주주로 있다. ‘범 현대가’가 뭉칠 수 있는 매개가 될 가능성인 큰 것. 범 현대가 컨소시엄이 구성될 경우엔 그 관계가 더욱 끈끈해질 전망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원래 정주영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 정신영 씨의 아들 몽혁 메티아(옛 아주금속) 사장의 몫. 정신영 씨는 1962년 <동아일보> 기자로 독일 취재 중 현지에서 사망했다. 신영 씨를 특별히 아꼈다는 정 명예회장은 유복자로 자란 몽혁 씨가 32세 때 파격적으로 현대오일뱅크의 전신인 극동정유 대표이사로 앉혔다. 정몽혁 사장은 한화에너지(현 인천정유)를 인수하는 등 몸집을 키웠다. 하지만 이로 인해 현대오일뱅크는 부채가 급증해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IPIC에 넘어갔고 정몽혁 사장도 물러나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 (왼쪽부터) 정상영, 정몽혁, 정일선 | ||
범 현대가 ‘단결’과 관련한 또 하나의 단서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이자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동생 몽우 씨 아들들의 자동차 부품사업 진출. 40대에 현대알루미늄을 맡은 정몽우 회장은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일선 문선 대선 형제들을 품은 것도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 정 회장은 조카 삼형제를 BNG스틸(옛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고 그 중 일선 씨는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있다.
그런 정일선 사장 삼형제가 최근 제3자 배정 유상증자 형식으로 등록업체 I.S하이텍 최대주주가 되려 했다. I.S하이텍은 자동차 전장(전기 배선) 부문을 강화하고 있어 일각에선 정 사장 형제들이 자동차 전장 사업에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했고, 여기에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배려가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분석도 뒤따랐다. I.S하이텍 측은 정 사장 형제들의 지분참여를 ‘단순투자’라고 밝혔고 곧 지분참여 규모를 축소했지만 I.S하이텍 주가는 ‘정씨’ 이름값으로 상한가를 쳤다.
지난 2월에는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일주일 만에 1400억 원을 쏟아 부어 삼촌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 주식을 비교적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상호 지분교류를 통해 관계를 돈독히 한 것이다. KCC는 지난 2003년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해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했다. 이어 지난해엔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대량 매집한 바 있어 숙질 간의 ‘교류’는 더욱 눈길을 끌었다.
▲ 현정은 회장 | ||
지난해 현대상선 지분경쟁에 뛰어들어 2대주주로 올라선 현대중공업이 추가 지분 매집을 감행해 1대주주로 올라서면 현대중공업이 오일뱅크를 가져가더라도 현대상선으로선 오일뱅크 물량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현대그룹과 현정은 회장으로선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현대상선을 손에 쥐면 현대엘리베이터를 제외한 현대그룹 계열사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지분 현황은 현정은 회장 측이 43.87%(우호지분 포함)로 현대중공업·KCC의 31.45%보다 우세한 상황. 때문에 ‘정씨 현대’와 ‘현씨 현대’ 싸움의 분수령은 현대건설 인수전이 될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은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대 KCC·현대중공업 등 범 현대가, 제3자 경쟁 구도로 짜여있다. 현대그룹의 모태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지만 현대건설은 결정적으로 현대상선 지분 8.3%를 쥐고 있다. 이 지분은 양쪽에게 다 결정타가 된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앞에서 살핀 ‘범 현대가’의 단일대오가 현실화된다면 ‘현씨 현대’의 현정은 회장의 방어전은 더 힘들어질 전망이다. 현 회장이 정씨 현대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지 그의 선택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