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 삼성 창업주 | ||
지금껏 맥이 이어오는 국내 재벌 1세대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대표선수로 꼽을 수 있다. 전경련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이 회장은 그의 성장시기가 국내 자본의 태동시기와 맞물려서인지 다른 재벌 창업주와 유독 동업한 예가 많다.
상점 시절부터 LG, 효성, 동양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기업의 창업주들이 모두 한때 이병철 회장과 동업을 했던 사이다. 이 회장은 말년에는 국내에서 파트너를 찾지 않고 일본의 전자업체, 미국의 GE 등 끊임없이 사업을 키울 수 있는 파트너와 ‘합방’을 주저하지 않았다.
최근에 창업주 전기를 발간한 오리온그룹이나 효성그룹의 창업주 회고록이나 사사에도 이런 과정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다만 삼성 쪽의 공식 문건이라 할 수 있는 <호암자전>에는 이런 과정에 대해 별말이 없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거나 손해본 기억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각사의 자료 등을 토대로 재벌 형성기에 벌어진 1세대 창업주들의 이합집산을 재구성해봤다.
이병철과 이양구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는 한국전쟁 직전 설탕 수입 계약을 하고 전쟁통에도 목숨처럼 간직했던 계약서 한 장으로 부산 피란시절 ‘설탕왕’에 올랐다. 설탕 수입·판매사업에 주력하던 그는 제당사업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제당기술이 없는 그로서는 섣불리 나설 수가 없는 상황. 당시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당기술을 가진 업체였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동업을 제안했다.
둘의 첫 만남. 이병철 회장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소공동에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세우고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판매하기 시작했다. 1954년 5월의 일이었다.
이 둘의 동업은 삼척시멘트 인수 때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제과업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던 1956년 말 이양구 회장은 경영난에 빠진 삼척시멘트 인수 제안을 받고 주변의 만류에도 인수 방침을 정한다. 그는 동업자들을 설득하는데 냉철한 성품인 이병철 회장은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지금 원조 물자로 들어온 시멘트와 수입 시멘트 때문에 시장이 포화상태입니다. 이런 와중에 굳이 삼척시멘트를 인수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양구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생각해 보시오. 전쟁 직후에 설탕 사업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아니었소? 설탕이든 시멘트든 상품과 경영의 원리는 똑같지 않습니까.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맙시다.”
결국 이병철 회장도 수긍했고 돈 1억 환을 공동 출자해 삼척시멘트를 인수했다. 그러나 인수한 지 6개월도 안 돼 1억 환의 적자가 나버렸다.
그러자 이병철 회장이 먼저 포기 의사를 밝고 다른 동업자도 손을 들었다. 그럼에도 이양구 회장은 설탕 관련 회사와 주식을 팔고 삼척시멘트를 단독 인수하며 사명도 동양시멘트로 바꾼다. 1957년 6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이병철 회장과의 동업은 끝이 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병철 회장의 ‘냉철한 판단’이 맞았다. 이양구 회장은 그후 동양시멘트로 인해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이양구 동양 창업주, 구인회 LG 창업주, 조홍제 효성 창업주 | ||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은 경남 진양군 지수보통학교에서 함께 공부했을 정도로 오래고 깊다. 또 1957년 구 회장의 삼남 자학 씨(아워홈 회장)와 이 회장의 차녀 숙희 씨가 결혼해 사돈이 됐다. 이 회장은 양가의 혼사 전 제당업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양가의 관계는 좋았다. 그렇게 돈독했던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업을 한 것은 라디오서울과 동양TV라는 방송사업이었다.
원래 동양TV는 이승만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김용우 씨가 5·16 후 군사정부와 접촉, 1962년 가허가를 따내면서 태동했다. 김 전 장관은 회사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의 재력으론 불가능했고 결국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동업을 제의했다. 이 회장은 쾌히 승낙한 뒤 사돈이자 한국 재계의 양대산맥이던 구인회 회장에게 공동투자를 제의,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가 태어난다. 가허가에서 허가를 내기까지 우여곡절 끝에 라디오서울과 동양TV는 1964년 시차를 두고 첫 전파를 발사한다.
당시 삼성과 LG는 동양TV 사장에 이병철 회장의 사돈인 홍진기 씨와 구인회 회장의 사돈인 이흥배 씨를 나란히 앉히며 공동경영에 나섰다. 그러나 양가의 동업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양가에서 파견된 임직원들 간의 알력이 심했던 것. 결국 개국 이듬해 라디오서울은 삼성이, 동양TV는 LG가 맡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투자금에 대한 정산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세간에 불화설까지 불거지자 구 회장은 이 회장이 머물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한다. “우리 손자들에게 할아버지끼리 싸웠다는 모습을 남겨서야 되겠나. 원한다면 호암(이병철 회장 아호)이 다 맡아 운영하게.” 구 회장은 이렇게 TV사업까지 삼성에 넘기고 철수한다. 사돈 간의 불화는 막아야 한다는 구 회장의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구 회장의 LG가 가풍인 ‘인화’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동양방송에 남았던 구자학 씨도 삼성이 삼성전자를 세우면서 LG의 아성이었던 금성사(LG전자)와 대립각을 세우자 LG그룹으로 되돌아가면서 삼성과 LG는 남보다 더 먼 사돈그룹이 됐다.
이병철과 조홍제
이병철 회장과 동향인 조홍제 효성 창업주가 사업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둘이 함께 1948년 말 삼성물산공사를 세우면서부터다. 조 회장은 회고록에서 이 회장에게 사업자금 800만 원을 빌려줬고 2개월 뒤 200만원을 더한 1000만 원을 투자금으로 전환, 이 회장이 이미 투자한 700만 원으로 삼성물산을 세웠다고 전한다. 반면 이 회장은 회고록에서 75%는 이 회장이, 25%는 조 회장을 포함한 여럿이 분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 회장은 사장, 조 회장은 부사장으로 동업을 시작해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계열사를 늘리며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다. 이들의 동업에 ‘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1년 9월. 이 회장은 경리책임자를 불러 결산을 지시했는데 지분율을 이 회장과 조 회장 각각 3 대 1로 보고한다. 조 회장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1960년 초 도쿄에서 이 회장은 불쑥 동업 청산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1951년 3 대 1의 지분율보다 자신의 것이 더 많다고 하자 조 회장은 정색하며 조목조목 따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4·19와 5·16을 거치며 조 회장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벌과금을 다 납입한 뒤인 1962년 어느날 두 창업주는 재산분배를 의논하며 주력 3사 중 제일제당을 조 회장이 갖는 것으로 합의한다. 하지만 이 합의도 곧 흐지부지되고 64년 조 회장이 이 회장이 있는 일본으로 날아가 조 회장이 생각한 자기 지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3억 원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것도 당시 부실기업이던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삼성 주식으로….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