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유로존에 이어 일본이 환율전쟁에 본격 참전을 선언하면서 새해 국내 증시 전망이 술렁이고 있다. |
1942년. 대서양을 두고 미국과 유럽(독일)의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미국 해군기지를 기습한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며 2차 세계대전을 명실공히 인류역사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탈바꿈시킨 사건이었다. 70년이 지난 2012년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일본 중앙은행을 통한 통화 공급 확대를 앞세워 정권을 탈환했다. 20일에는 일본 중앙은행이 10조 엔의 국채 추가 매입과, 15조 엔의 민간대출확대 계획을 내놨다. 미국과 독일이 이끄는 유로존이 2009년부터 별러온 환율전쟁에 일본이 본격 참전을 선언한 것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가 터지자 미국과 유로존은 각각 달러화와 유로화 대량공급으로 해결에 나섰다. 부실을 메우고 시중에 돈을 풀어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의도였다. 결국 일본 엔화는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수출부진과 내수침체에 시달려왔다.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은 환율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본 경제를 부양시키겠다는 데 있다. 달러·유로·엔, 세계 3대 통화의 공급확대는 원화강세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수출 중심인 한국 경제에서 무역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많은 이유다.
그럼 이 같은 환율전쟁은 우리 증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엇갈린다. 먼저 긍정론은 이미 국내 수출 대기업의 기술경쟁력이 글로벌 수준에 오른 만큼 원화강세로 인한 가격경쟁력 약화가 급격한 시장점유율 축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반면 부정론은 그동안 한국에 빠른 추월을 당했던 일본 및 선진국 기업들이 환율을 무기로 반격을 해올 것이란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다.
영향이야 상황이 벌어져봐야 아는 것이지만, 실제 중요한 것은 글로벌 환율전쟁에서 우리 정부의 선택이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환율전쟁을 겪었다. 첫 싸움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다. 당시 정부는 수출보다 물가를 택했다. 그래서 외환보유액을 소진시켜가면서 ‘1달러=800원’의 환율을 지키려 애썼다.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였고,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국민들은 물가고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두 번째는 2008년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졌을 때다. 당시 정부는 1997년을 반면교사 삼아 물가보다는 수출을 택했다.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원화 값이 급락했지만 외환보유액을 털어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 원화 급락시에는 방어에 나선 것으로 보이지만, 1달러당 1100~1200원이라는 수출기업들의 ‘환율 손익분기점’ 아래로까지 개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수출 중심 정책은 서민 체감물가에 치솟게 해 중산층을 궤멸시키는 등 치명적 부작용도 있었다는 비판이 많다.
2013년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는 세 번째 환율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증시 영향은 달라질 수 있다. 먼저 수출을 택하는 경우다. 금리를 더 떨어뜨려 원화 가치를 낮추고, 시장에 달러를 내다팔아 원화 공급을 늘리는 방법 등이 가능하다. 수출 대기업들은 글로벌 실물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이익감소폭을 최소화하며 버틸 것이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고환율로 인한 원자재 구입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증시는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수출 대기업 중심의 구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적으로 풀린 돈이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신흥국 증시로 이동하면서 2009년이나 2010년과 같은 유동성 장세가 펼쳐질 수 있다. 다만 글로벌 실물경제의 침체가 본격화되고, 환율을 전면에 내세운 글로벌 다국적기업 간 경쟁 때문에 큰 폭의 이익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대세다.
만약 물가를 택한다면 결과는 반대다. 방법은 금리를 올려 시중의 원화를 회수하고, 외국인들의 달러매수를 방치해 원화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다. 이 경우 수출 대기업들은 수익성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익이 급감하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일단 이익 증가세에 제동이 걸리면서 그동안의 주가 밸류에이션(평가가치)을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가계부채 문제가 불거지면서 기대와 달리 내수 위축이 나타날 수도 있다.
특히 원화강세는 그동안 환차익을 노리고 들어왔던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만약 환율이 1달러에 1100원일 때 한국 주식을 산 외국인이 있다면, 1달러에 900원이 됐을 때 이 주식을 팔면 1.22달러를 회수할 수 있다. 환차익에서만 22% 이익이 나는 것이다. 임지원 JP모건 경제분석가는 “향후 2년 내에 원-달러 환율은 900원대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외환시장에서는 매년 은행 금리 이상의 환차익 기회가 발생살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물가를 택한다고 해서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가 반드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외환보유액 규모나 단기외채 비중, 중국과 미국 등과의 통화스왑(Swap) 등 안정장치들이 15년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튼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3000억 달러 규모인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을 경제규모와 구조를 감안할 때 5000억 달러까지는 불려놔야 외환위기로부터 안정권에 들 것이란 전망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 증시를 평가할 때 가정 먼저 보는 게 ‘과연 달러가 있느냐’이다”면서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달러가 절실한데, 만약 수출둔화로 달러공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외국인들은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으로 하루 빨리 자금을 회수하려 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도 이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환율전쟁이란 큰 흐름 아래에서 전문가들이 거의 모두 동의하는 분명한 한 가지는 증시 기대수익률이 철저히 낮아질 것이란 점이다. 이익 안정성은 높고 불황에서도 잘 견디는 기업들이 주목 받을 것이란 조언이다. 증권사들이 내놓은 2013년 코스피 전망도 1800~2300이 대부분이다. 전고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박스권 장세를 예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큰 투자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배당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전망이다.
홍기석 드림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이에 따라 주주들에게 돌려줄 수익은 성장수익보다는 배당수익이 높아지는 게 보통의 과정이었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저성장, 저금리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주주들의 요구가 성장에서 배당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