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현대건설은 그룹의 모태며 상징적인 존재다. 게다가 현대건설이 가진 현대상선 지분 8.3%는 현정은 회장에게 경영권 방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증권가 주변에 잇따라 나돌고 있는 현대증권 매각설도 사실 현대건설 인수 자금 마련이라는 이유 때문에 증폭돼 왔다. 현재 상황에서 현대건설을 포기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현대상선, 더 나아가 현대그룹 경영권 방어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뜬금없는 ‘현대건설 포기설’의 배경에는 현대건설 없이 그룹 경영권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농협, 현대증권 지분 20% 1.5조 원 인수 추진.’
지난 7월 30일 한 인터넷 언론은 농협 관계사 고위임원의 말을 빌려 ‘농협이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증권 지분 20.38%를 1조 5000억 원에 매입하는 것으로 양측 간에 의견교환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현대증권 주가는 요동을 쳤다.
그러자 현대증권은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고 이례적으로 강연재 부사장이 직접 이 언론사를 방문해 강력하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회공시 요구에 대한 답변에선 “선의의 투자자 보호를 위하여 관계 당국에 주가 이상 급등 관련 증권거래법 위반행위 등 불법행위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를 의뢰하겠다”고까지 밝혔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도대체 몇 번을 아니라고 얘기했나.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증권과 그룹 측은 지금껏 매각설을 강하게 부인해왔다. 그럼에도 현대증권 안팎에선 잘 믿지 않는 분위기다. 전국민주금융노동조합 현대증권지부도 노보를 통해 “노동조합은 투쟁과정에서 (매각에 관한) 다량의 정보를 입수했으며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보했다”며 “회사가 아무리 매각을 부인한다고 해도 노동조합은 믿을 수 없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매각설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먼저 자본시장통합법 등으로 증권사 몸값이 올라 좋은 여건이 조성됐고 현대건설 인수를 추진하는 현대그룹에서 큰돈이 나올 곳은 현대증권 매각뿐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금산분리 원칙에 걸릴 수도 있다. 현대그룹으로선 비쌀 때 파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듯하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재계 일각에서 현대건설을 배제한 ‘현대그룹 경영권 방어 시나리오’가 대두됐다. 지금껏 현대증권 매각설의 가장 큰 논거는 현대건설 인수 자금 마련이었기에 눈길을 끈다. 이 시나리오에는 “두 달 전쯤 현대그룹 핵심 조직에서 논의된 것이다. 현대증권 매각도 현대건설 인수자금이 아니고 이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라는 그럴 듯한 얘기가 덧붙여져 귀를 솔깃하게 한다.
현재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정은 회장의 모친 김문희 씨+현 회장→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택배·현대증권·현대아산 등으로 이뤄져 있다. 김문희 씨는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최대주주로 19.36%, 현대택배는 12.27%를 보유,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다. 현 회장의 지분은 3.92%다.
시나리오의 골자는 이렇다. 우선 비상장사인 현대택배가 증자 등을 통해 실탄을 확보한다. 증자에는 현정은 회장이나 현 회장이 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현대U&I 등 계열사가 참여해 지분율을 높인다. 현대택배는 확보한 자금으로 김문희 씨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9.36%를 매입한다. 이렇게 되면 현대택배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율은 31.63%로 급상승하며 확실한 지배권을 갖는다.
이어 현대엘리베이터에서 손을 뗀 김문희 씨는 이 자금으로 지배력이 취약한 현대상선 지분을 산다. 김 씨가 조달할 수 있는 매각대금을 지난 1일 종가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1857억여 원.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현대상선 지분은 3.19%다.
동시에 현대상선은 현대증권 지분을 매각해 그 자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한다. 매각 금액이 보도로 알려진 1조 5000억 원대라면 이 돈으로 현대상선이 살 수 있는 자사주는 25.74%. 기존의 자사주와 합치면 26%를 넘기게 된다. 이렇게 매입한 자사주와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 현 회장 일가의 지분을 합치면 직접적인 현 회장 측 지분은 50%에 가까운 47%대로 올라가 현대중공업그룹과 KCC의 지분(31%대)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설령 현대중공업이 현대건설을 인수, 현대상선 지분 8.3%를 가져간다 하더라도 안정적이다. 현대건설이 필요 없게 되는 부분이다.
모든 작업이 완성되면 지배구조의 정점은 현대택배가 된다. 현대택배의 최대주주는 현대상선(47.15%)이고 현정은 회장도 12.61%를 갖고 있다. 합치면 59.76%나 된다. 증자 과정에서 현 회장의 지분율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결국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대택배→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에서 다시 현대택배에 이르는, 삼성과 비슷한 환상형 순환 구조로 재편되고 현정은 회장의 그룹 경영권은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현재로도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그런 시나리오는 논의된 바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또 “현대건설은 몸값이 너무 올라 지금은 우리뿐만 아니라 아무도 못 가져간다. 현대건설 인수를 포기한 적 없으며 인수할 수 있는 복안도 마련해놓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측도 부인했지만 앞의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시나리오’다. 또 그렇게 진행한다고 해도 현대중공업 등 이해당사자들이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가져올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럴 듯한 방안으로 평가된다. 이 시간에도 현 회장의 ‘묘수풀이’는 계속될 듯하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