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내가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어머니는 생활비를 1년에 한 번만 주셨다. 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대학시절 어머니는 나에게 부동산 계약을 직접 하도록 하셨다. 처음에는 암담했지만 계약을 끝내면서 부동산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서른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지점장을 맡아 고전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갑자기 전화를 걸어 “현주야, 너무 성공하려고 하지 마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조급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영업실적이 좋지 않았던 점포에다 초임 지점장이라 돈이 부족하던 시절, 어머니께 1년간 생활비를 부탁했다. 어머니는 그냥 주시지 않고 빌려주셨다. 나는 이자를 꼬박꼬박 드렸는데 연리 17%에 달하는 고금리 대출이었다. 어머니는 돈을 주시면서 “나도 돈이 없어 빌려서 주는 것이니 꼭 갚으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의 주인은 어머니였다. 남의 돈 쓰는 것의 무서움을 알도록 하기 위해 나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던 것이다.
신임 지점장 시절 어머니는 몇몇 고객을 소개해 주셨다. 그중에는 친척 한 분이 2000만 원을 투자하셨다. 시장상황이 좋지 않아 그 친척의 계좌에 손실이 발생했다. 그 친척은 ‘돈을 물어내라’며 막무가내로 거칠게 항의했고 나는 억울했지만 어머니가 난처하실 것 같아 원금을 돌려줬다. 그런데 그 돈도 실은 어머니의 돈이었다.
투자론
투자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높은 수익이 아니다. 치명적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칫 치명적 실수를 범하면 재기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길은 굳건한 원칙을 가지고 우량자산에 장기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목을 고를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동업자를 고른다면 어떤 사람을 고를 것인가.’ 이 경우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부터 돈에 대한 관념 경험 등을 꼼꼼히 체크하게 된다. 이렇듯 좋은 사업파트너를 구하는 심정으로 투자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나에게는 세 가지 투자원칙이 있다. 첫째 나는 모르는 일이나 모르는 투자처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금융시장에 지각변동이 한창이던 시절 한 은행이 매물로 나오자 미래에셋이 인수전에 참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거절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은행업을 잘 모른다는 것. 다른 하나는 투자전문회사를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둘째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한다. 미래에셋의 비즈니스 모델은 장기적 관점에서 결정된 것이다. 펀드 운용 역시 장기적 투자기록에 관심을 둔다.
셋째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첫째와 둘째 원칙을 반드시 지킨다. 유혹을 느끼면 ‘내가 잘 알고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면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부동산
사람들은 내가 주로 주식시장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부동산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학창시절부터 부동산 공부를 하면서 터득한 투자 원칙은 첫째도 입지, 둘째도 입지, 셋째도 입지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일하고 싶고 살고 싶은 곳에 투자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2007년 1월 경기도 기흥에 위치한 미래에셋 연수원의 구입을 결정할 때도 ‘부동산은 겨울에 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판단했다. 봄이나 여름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의 푸른 잎사귀가 부동산을 감싸기 때문에 실제 가치보다 좋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 꽃도 없고 나무도 앙상한 겨울에는 부동산이 맨몸을 그대로 세상에 보여준다.
미래에셋은 국내에서 주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계획이다. 오피스 빌딩과 호텔 등 장기투자가 가능한 부동산에만 주력할 작정이다.
샐러리맨의 꿈
대학시절부터 내겐 꿈이 있었다. 한국 자본시장에서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첫 직장으로 박봉에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았던 증권회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1987년 내가 증권사에 입사했을 때 성과급을 제외한 월 급여는 약 12만 원이었다. 단자회사나 종금사는 월 85만 원, 단자회사의 고졸 여직원 급여는 40만~50만 원이었다. 증권사 직원들은 꼴등 신랑감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장인 장모님은 증권사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에 조금은 부정적이셨다. 결국 두 시간 동안 요즘으로 얘기하면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왜 증권업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를 설명하고 나서야 승낙을 받았다.
최고의 증권맨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혹이 있었다. 전국 1위 점포를 달성했을 때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 원을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해왔다. 차장 시절인 서른다섯 살 무렵이다. 10억 원은 당시에는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금액이었다. 나는 자산운용업의 꿈을 위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정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고객의 돈을 맡아 자산운용업을 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다.
위기는 기회
1989년 증시 폭락 등 최악의 시점에 지점 발령을 받았다. 어느날 지점장이 회사를 그만두자 유성규 상무(전 미래에셋 부회장)는 “지점장을 해보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서른두 살의 지점장, 대단한 파격이었다. 처음에는 ‘준비가 안 됐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유 상무는 계속 권했고 장고를 거듭했다. 결국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저 점포를 내실화하기로 마음먹었다. 50명이던 인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영업직원 수가 많아야 지점 약정도 좋아진다는 게 관행처럼 되어있던 때에 정반대 전략을 취한 것이다. 나는 30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구축했다. 이때 최현만 대리(현 미래에셋증권 사장) 구재상 대리(현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 등을 만났다. 나에게 첫 지점장 발령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그때 지점장을 맡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미래에셋은 없었을 것이다.
대인관계
나는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두 가지 있는데 지점장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것이다.
첫 번째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에 반드시 샤워를 한다. 지금도 마케팅 관련 직원들에게 고객을 만나러 가기 전에 샤워를 하고 가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담배도 끊으라고 한다. 건강이 모든 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체력은 영업을 할 때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한다.
두 번째는 재미있게 얘기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만나 비즈니스 얘기만 하고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대방이 즐겁게 들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그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하지 않겠는가. 평소 책과 신문을 읽으면서 화제가 될 만한 소재를 머릿속에 입력해 놓는 습관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독서
어린 시절부터 책은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위인전기를 모조리 읽었다. 방황했던 청소년기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미국 외교사의 한 획을 그은 <헨리 키신저 자서전>, <카네기 자서전> 등을 읽었다.
특히 위인들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런 책들이 대학시절 ‘내가 직접 조직을 만들어 경영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준 것 같다. 대학시절에 읽은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열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며 철저히 곱씹었다.
또한 중국의 장기 트렌드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 지도자들의 평전도 즐겨 읽는다. 중국 공산주의의 아버지 마오쩌둥. 개혁·개방 정책의 입안자 덩샤오핑 등의 삶을 읽다 보면 중국의 현재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이해하는 데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금융업에서만 일하다 보니 자꾸만 감수성이 말라가는 것 같아 가끔은 일부러 시집이나 수필 등을 읽기도 한다. 역사책이나 사람의 인생을 다룬 책들도 가까이한다. 요즘 내 호기심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 역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서점을 찾는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였다.
정리=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