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10구단 유치에 나선 KT·수원의 이석채 KT 회장(왼쪽)과 김문수 경기지사가 10일 심사위원를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한 뒤 회의장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저쪽에선 도 체육국장이 나선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1월 9일. ‘10구단 선정 평가심사회’를 하루 앞두고 수원시청 공무원들과 KT 스포츠단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논의했다. 이날 KT·수원 10구단 유치팀이 가장 고민한 건 프레젠테이션(PT)이었다. 22명의 심사위원을 상대로 누가 PT를 잘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게 분명했다.
지난해 KT 스포츠단은 정보통신부에서 주관하는 PT 대회에서 몇몇 대기업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PT는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전혀 다른 무대였다. 당시 KT 스포츠단 관계자는 “야구계의 분위기가 어떤지, 야구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따라서 KT는 ‘어떤 내용이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중량감이 넘치는 인사가 직접 PT에 나설 시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때 마침 내부 정보가 들어왔다. ‘유치 라이벌’ 부영·전북에서 PT 발표자로 실무 관계자가 나올 것이라는 정보였다. 실무 관계자라면 전북 체육국장과 부영·전북 유치를 지지하는 교수임이 분명했다.
KT·수원은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PT 발표자를 예정대로 중량감 있는 인사로 확정했다. 바로 이석채 KT 회장, 염태영 수원 시장이었다. 대기업 CEO와 지자체장이 PT 발표자로 나서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회장과 염 시장은 9일 일정을 전부 연기한 채 PT 자료를 훑어보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염 시장은 “시장 선거 토론회 때보다 더 긴장했다”며 “수원 시민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날을 새며 PT를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10일 심사회 당일이 되자 부영·전북 10구단 유치팀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PT 자료를 세심히 점검하며 심사위원들을 설득할 획기적인 제안들이 무엇인지 살폈다. 그때 부영·전북팀에 정보가 들어왔다. KT·수원의 PT 발표자로 이 회장과 염 시장이 출동한다는 소식이었다.
부영·전북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전날까지 부영·전북은 PT 발표자로 실무형 관계자가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흘렸다. 하지만, 실은 이중근 부영 회장과 김완주 전북 도지사가 PT 발표자로 나설 참이었다.
CEO와 도지사가 동반 출격한다면 10구단 유치 진정성을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수원의 발표자 역시 CEO와 시장임을 눈치 채고선 맥이 풀렸다. 하지만, 부영·전북은 갖가지 파격적 제안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KT·수원과 부영·전북은 10일 오전 10시가 넘도록 KBO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은 고사하고 심사 시간과 장소조차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 이는 KBO의 철저한 보안 때문이었다.
KBO는 심사 당일까지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유는 ‘심사위원과 시간, 장소가 알려질 시 로비가 이뤄질 수 있고,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었다.
KBO는 심사위원 선정부터 로비 차단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애썼다. 수백 명의 심사위원 후보명단을 작성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KBO 관계자는 “선정위원 후보 가운데 어느 한 쪽에 편향될 가능성이 있는 인사와 과거 편향된 발언을 했던 인사들은 모두 제외했다”며 “최종 선발된 22명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심사 당일까지 보안에 각별히 신경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100% 보안은 지켜지지 않았다.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모 인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심사 전날 모 측에서 전화가 와 ‘고향팀에 10구단이 유치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나마 KBO에서 보안 유지에 신경 써 나 말고는 다른 심사위원들에겐 전화가 가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조금만 보안이 허술했다면 심사위가 완전 로비판이 될 뻔 했다”고 말했다.
KBO의 보안은 KT·수원과 부영·전북이 제출한 창단 계획서 관리에서도 돋보였다. KBO는 양측으로부터 받은 창단 계획서의 사전 유출을 막으려고, 서류봉투를 밀봉해 보관했다.
양측이 KBO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오전 11시무렵이었다. KBO는 심사 장소와 시간을 알리며 “부영·전북이 먼저 PT를 시작하고, 그 다음 KT·수원이 진행한다”고 통보했다. 양측의 PT는 무리 없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 심사위원은 “양측의 구단 운영안과 새 구장 신축안이 대동소이했다”며 “그러나 KT의 야구발전 제안이 원체 파격적이라, 그걸 듣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 양해영 KBO 사무총장이 11일 이사회가 끝나고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
승부를 가른 건 야구발전기금이었다. 심사에서 야구발전기금은 배점이 높은 평가항목이었다. KBO 이사회에서도 야구발전기금 액수에 관심이 많았다.
모 구단 사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KBO가 야구발전기금 131억 원을 현대에 빌려줬다. 그런데 무원칙하게 빌려준 바람에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당시 KBO 집행부는 ‘현대를 인수하는 기업에게 120억 원을 돌려받겠다’고 공언했지만, 히어로즈는 야구발전기금은 고사하고, 가입금도 분할납부할 처지였다. 결국 이 돈은 허공에 뜨고 말았다. 이사진 가운데 상당수는 ‘야구발전기금을 어느 쪽이 많이 쓰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애초 부영은 야구발전기금으로 100억 원을 쓰겠다고 공표했다. 9구단 NC가 냈던 20억 원보다 5배가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부영은 실제론 80억 원을 적어냈다. 반면 KT는 이사회의 기류를 감지한 터였다. 그래서 200억 원이라는 예상 밖 금액을 적었다.
야구발전기금 말고도 KT·수원의 파격안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돔구장이었다. KT·수원은 기존 수원구장 리모델링과는 별개로 2020년까지 4만 석 규모의 최첨단 돔구장을 짓겠다고 공언했다. 야구발전기금이 KBO 이사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돔구장은 야구계의 환심을 사는 결정타가 됐다는 후문이다.
애초 KBO는 10일 심사회 결과를 바로 언론에 공개하는 안을 고려했다. 이사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이사회가 심사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표했고, 10구단의 무게감을 고려해 이사회가 직접 창단 주체를 발표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로 했다.
11일 오전 9시부터 시작한 이사회는 심사 결과를 바탕으로 논의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구단 창단 주체로 KT가 적합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모 구단 사장은 “심사결과가 KT쪽에 유리하게 나왔고, 많은 심사위원이 KT의 창단 적합성을 지지했기에 이사회에서도 이를 수용한 것”이라며 “야구발전기금과 돔구장 건설이 (선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사회가 KT의 손을 들면서 치열했던 2년간의 10구단 유치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승자가 된 KT·수원은 “지난해 5월 KBO에 창단 의향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10구단 유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며 “그러나 전북이 유치전에 뛰어들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KT·수원 관계자는 입을 모아 “좋은 파트너가 있었기에 10구단 유치를 더욱 탄탄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며 부영·전북 측의 노고에 감사함을 표했다.
아쉽게 10구단 유치에 실패한 부영·전북은 최선을 다했다는 태도다. 부영·전북 관계자들은 “KT·수원에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고 말하고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했지만, 끝까지 완주하면서 도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며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신생구단 창단을 반드시 전북에 유치하겠다”고 다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회장님이 점찍어 놨다고?
▲ 부영ㆍ전북 제10구단 창단 선포식연합뉴스 |
모 구단 단장은 “이석채 KT 회장이 직접 초대 사령탑으로 ‘모 감독’을 이미 결정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예전부터 그런 소문이 있어 야구계에선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KT 관계자는 “회장님이 특정인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문은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이 관계자는 “회장님이 야구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구단 운영안까지 세부적으로 설계해 놓기엔 그간 그룹경영에 신경쓰시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며 “회장님이 특정인을 감독 후보로 거론한 적도 없다”고 반박했다.
KT의 구단 구성은 NC의 전례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NC는 스카우트팀을 먼저 조직하고, 단장을 선임한 뒤 사장을 결정했다. 그리고 나서 가장 마지막으로 감독을 영입했다. 이는 전형적인 미 메이저리그식 신생구단 구성법으로, 당면 과제인 신인지명회의부터 최선을 다해 임하겠다는 뜻이다.
NC 관계자는 “감독부터 선임하면 감독 의향에 따라 팀이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며 “당장 성적을 내야 하는 감독과 달리 구단은 미래를 내다봐야 하기 때문에 프런트를 먼저 구성하고, 가장 나중에 감독을 선임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조언했다.
KT는 신생구단답게 ‘역동적이고 새로운 야구를 지향할 인물’을 초대 감독으로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다 풍부한 경험과 선수 육성능력을 갖춘 인물을 영입 0순위로 염두한 것으로 보인다.
KT 사정을 잘 아는 야구인은 “신생구단이기 때문에 프런트와 대화가 잘 통하고, 구단의 비전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야구인이 초대 감독으로 선임될 확률이 높다”며 “KT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초대 감독 선임을 고려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전북 ‘독주’ 전주 ‘왕따’
▲ 부영ㆍ전북 제10구단 창단 선포식연합뉴스 |
10구단 유치전은 KT·수원의 승리로 끝났다. 인구 150만 명이 넘는 광역급 도시 수원의 규모와 재계순위 15위의 대기업 KT의 위용으로 승부는 처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12월 중순만 해도 부영·전북의 유치 노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가 많았다. 부영·전북의 공격적인 홍보가 KT·수원보다 앞섰고, 각종 제안 역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즈음까지 ‘마타도어 싸움에 휘말리기 싫다’며 별다른 홍보를 펼치지 않았던 KT·수원이 황급하게 홍보전에 뛰어든 것도 부영·전북을 호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부영·전북은 좋은 흐름을 이어가는데 실패했다. 먼저 부영·전북 유치위의 핵심인사들이 지나치게 ‘올드’하고, 전직 KBO 출신이 다수 포함됐다는 게 악재로 작용했다. 실제로 이용일 전 KBO 총재, 이상국 전 KBO 사무총장, 박노준 전 히어로즈 단장은 하나같이 과거 인사들로 10구단이 지향해야할 ‘새로운 야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여기다 조희준 전 KBO 국제부장까지 유치위에 가세하며 “전직 KBO 인사들이 특정 유치위에 쏠려도 너무 쏠렸다”는 비판 여론이 제기됐다. 한 심사위원은 “반면 KT는 야구인 출신의 유치위 참여를 최소화하며 부영보다 ‘새롭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평가했다.
김완주 전북 도지사의 ‘독주’도 문제였다. 애초 KBO가 10구단 유치를 제안한 곳은 전북이 아니라 전주였다. 하지만, 전주가 인구 100만 명이라는 신생구단 창단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자 KBO는 “완주, 군산, 익산 등과 연합 연고지를 구축하라”고 조언했다. 이때만 해도 10구단 유치의 중심키는 전주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전북이 “4도시의 의견을 조율하겠다”고 나서며 전주는 뒤로 빠지고, 전북의 일방독주가 시작됐다. 아니나 다를까. 전주는 소외감을 토로했고, 완주, 군산, 익산 역시 전북의 일방통행식 유치전에 불만을 털어놨다.
반면 수원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측면지원 속에 염태영 시장이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염 시장은 혹여 자신의 유치 노력이 ‘정치적 행동’으로 비칠까 봐 담당 공무원들에게 대거 권한을 위임하고 김 지사처럼 그림자 지원에 주력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