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경신 감독.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서울이 영하 12도로 내려간 혹한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 중인 선수들이 있다. 4년 연속 남자 실업 핸드볼 정상에 오른 두산베어스이다. 그런데 그들이 훈련하는 공간은 난방이 전혀 안된 의정부실내체육관. 바깥 공기보다 체육관 안이 더 춥게 느껴질 정도의 한기를 접했지만, 선수들과 감독은 그 추위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세계선수권대회로 인해 대표팀에 차출된 6명의 선수들을 제외하니 남은 선수들은 딱 6명. 원활한 훈련조차 버거운 상황이지만, 선수들은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새해 신임 감독을 만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두산의 핸드볼팀을 이끄는 감독은 바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윤경신(40) 감독. 지난 2일 전 소속팀이었던 두산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그는 두꺼운 점퍼를 입고 손을 호호 불며 선수들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해 9월 대표팀 은퇴식을 치른 뒤 모교인 경희대로 돌아가 박사 학위 논문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그가 3개월 만에 다시 코트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훈련을 끝낸 윤 감독을 ‘따뜻한 방’에서 만났다.
―두산 핸드볼팀은 남자 실업팀 최정상에 있는 팀이다. 그런데 전용 체육관은 고사하고 난방조차 안 되는 곳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한국 핸드볼의 현실이다. 아직 프로화가 되지 않아서 선수들의 훈련 환경이 굉장히 열악하다. 무엇보다 체육관을 빌려서 사용하다보니 스케줄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선수들도 땀을 흘린 후 바로 씻어야 감기에 걸리지 않을 텐데 훈련 마치고 차로 이동해 숙소에서 샤워를 한다. 안타까운 부분이 많지만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래도 훈련 분위기가 굉장히 밝아 보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두산 소속 선수로 뛰었던 부분이 지도자로 선수들을 만났을 때 조금은 더 편했을 것 같다.
▲나보다는 선수들이 더 편해 하는 것 같다(웃음). 아무래도 ‘형’으로 불렸던 선배가 소속팀 감독으로 오니까 심리적으로 안정된 부분은 있을 것이다. 아마 두산이었기 때문에 잠시 학교 공부를 보류하고 다시 돌아왔는지 모른다. 내가 아끼고 챙겼던 후배들이 모두 이 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2년 전, 두산과 재계약이 불발돼 팀을 나가게 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완전히 가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핸드볼이 프로 스포츠처럼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받는 종목이라면 재계약을 앞둔 나에게 1년도 아닌 8개월 제안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나름 핸드볼을 통해 국위선양을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에게 왜 이런 대우밖에 못해줄까에 대해 화도 많이 났다. 결국 팀을 나오고, 대한핸드볼협회 소속이라는 애매한 자격으로 국가대표팀 플레잉코치로 발탁돼 지난 런던올림픽에 참가했었다.
―그런 상처들로 인해 처음 두산에서 감독직 제의가 왔을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 같다.
▲ 소속팀이었던 두산의 사령탑으로 부임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윤경신 감독을 만났다.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그런 이유보다는 내가 가고자 했던 은퇴 후 방향이 대학 강단이었기 때문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나랑 재계약 문제를 논의했던 구단 관계자 분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웃음).
―지금까지 올림픽에 다섯 번이나 출전했지만 메달은 하나도 목에 걸지 못했다. 누구보다 지난 런던올림픽이 소중했을 것 같다.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올림픽 메달 하나 만들어서 보관하려고 한다(웃음). 지금도 올림픽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올림픽에 다섯 번 출전하기도 어렵지만, 다섯 번 나가서 메달 하나 못 따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웃음). 23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하는 대표팀 은퇴식을 치르면서도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은퇴하면서 핸드볼을 아예 잊고 싶었다. 당분간이라도 핸드볼을 잊고 공부에 매진하고 싶었다. 핸드볼을 떠올리면 좋은 일, 힘들었던 일, 아팠던 일들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데 대표팀에선 은퇴했지만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진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당시 신생팀이 창단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어서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표팀 은퇴 후 사람들 만나고 술도 마시다 보니 체력적으로 회복이 안 될 것 같더라(웃음). 솔직히 명예회복을 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실업팀에서 이상하게 나오게 됐고, 대표팀에선 올림픽 메달 한 개 없이 마무리하게 됐고, 이렇게 그냥 그만두게 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선수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결국 포기하게 됐지만 말이다.
―‘윤경신’하면 프로필이 굉장히 화려하다. 13년간 독일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 득점, 한 시즌 최다득점, 득점왕 8회를 기록하며 ‘한국의 호나우두’ ‘한국의 메시’ 등 엄청난 타이틀을 달았다. 핸드볼계의 거인으로 불릴 정도의 영광스런 타이틀을 달고 있는 선수가 프로팀도 없는 한국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영위해 나갔던 게 신기했을 정도이다.
▲비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찬호 씨가 메이저리그의 영광을 뒤로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화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심정과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외국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다. 그 그리움을 어떻게 해서라도 풀고 싶고, 그 방법이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열악한 한국의 핸드볼 환경에 잠시 한국 복귀를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지내다보니 무뎌지고 익숙해지더라.
―올림픽에서 못 딴 메달을 나중에 대표팀 감독이 돼 따보는 건 어떤가?
▲하하,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든 가짜 메달보다는 진짜 메달이 더 좋을 것 같고, 선수로선 이미 끝났으니까 지도자가 돼서 따오는 건 어떨까? 하는…. 지금은 두산 감독 자리도 버겁다. 나중에 지도자 경험을 많이 쌓은 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도전해 보고 싶다.
해마다 우승팀으로 군림했던 두산 핸드볼팀. 1등이 당연시 되고 있는 팀의 감독 자리가 윤경신 감독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잘 하면 ‘본전’, 못 하면 ‘피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 감독은 유럽과 한국을 넘나드는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접목해 후배 양성에 앞장서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경희대 졸업 후 1995년 독일 분데스리가 굼머스바흐 입단, 8회 득점왕, 96애틀랜타올림픽을 제외한 92년 바르셀로나서부터 2012 런던올림픽까지 5회 올림픽 출전, 2002년 국제핸드볼연맹이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 수상, 95, 97세계선수권대회, 2004년 아테네올림픽 득점왕에 오름.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부터 2010년 광저우대회까지 아시안게임 6차례 출전, 금메달 5개 획득. 2008년 독일에서 귀국, 두산에서 3년 동안 선수로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