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숫자를 뜯어보면 해석은 달라진다. 최태원 회장이 언급한 600조 원은 당장의 건설비용뿐 아니라 향후 20년 이상 투입될 설비 유지·보수, R&D(연구개발), 협력회사 투자까지 모두 합산한 ‘초장기 추계’다. SK가 공식 발표한 확정 자본지출(CAPEX)인 122조 원과는 괴리가 크다.
재계에서는 정부 지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대치’를 강조한 전략적 발언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20~30년에 걸쳐 600조 원이 투입되는 동안, SK하이닉스는 매년 수십조 원을 벌어들일 기초 체력을 갖췄다. 9월 말 기준 SK하이닉스의 자본은 100조 원, 부채는 48조 원으로 부채비율이 50% 미만이다. 돈을 빌릴 여력(차입 여력)은 이미 충분하다는 뜻이다. 증권가에서는 SK하이닉스의 잉여현금흐름(FCF)이 2025년부터 2027년 사이 100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600조 원을 2050년까지 나눠서 투자한다고 가정하면, 투자금 회수 속도가 지출 속도를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정부와 여당은 SK의 요청에 화답해 관련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핵심은 지주회사 SK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가 자회사(증손자회사)를 설립할 때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하는 의무를 50%로 낮추고,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금산분리) 빗장을 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SK하이닉스는 지분 50%만으로 ‘금융리스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된다.
SK하이닉스는 이 리스 자회사를 통해 반도체 장비를 조달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지분 50%에는 150조 원 규모로 조성될 정부 주도의 ‘국민성장펀드’가 참여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구조를 뜯어보면 ‘SK하이닉스와 정부의 합작법인’이 빚을 내 장비를 사고, SK하이닉스는 이를 빌려 쓰는 형태다. 문제는 수익 배분이다. 국민성장펀드는 고작 장비 임대료(이자 수익) 정도를 챙기는 데 그치지만, 이 장비로 생산한 반도체를 팔아 남기는 천문학적인 이익은 온전히 SK하이닉스가 독차지한다. 전형적인 ‘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 모델이 될 수 있다.

SK하이닉스가 추진 중인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활용한 자사주 매각 역시 규제의 허를 찌른 ‘묘수’로 평가받는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3차 상법 개정안은 신규 취득 자사주는 1년, 기존 자사주는 1년 6개월 내 소각을 의무화하고 있다. SK는 이 법망이 조여 오기 전에 자사주를 해외에 상장해 9조 원에 달하는 현금으로 맞바꿀 태세다. ‘반도체 투자 실탄 마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소각 의무를 피하면서 현금까지 챙기는 ‘일석이조’ 전략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SK가 ADR을 통한 자사주 유동화 선례를 만들면 다른 대기업들도 줄줄이 이를 따를 것”이라며 “SK가 재계 전체에 규제 우회로를 뚫어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최열희 언론인














